재능을 만난 권태가 집착이 되기까지.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 리뷰

by 차돌


영화는 작은 유치원을 단장하는 중년 여성 리사의 일상으로 시작한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과 헐렁한 옷차림이 우선 눈에 띈다. 매기 질렌할 특유의 팔자주름이 도드라질 수밖에 없는 수수한 모습에 왠지 모를 편안함과 리얼리티마저 느껴진다. 이윽고 펼쳐지는 화면에서 관객들은 리사의 관심사와 그녀의 가족에 대해 금세 눈치챌 수 있다. 저녁마다 평생교육원에서 시(詩) 수업을 듣는 리사. 배불뚝이 사내의 아내로서, 반항기에 있는 두 자녀의 엄마로서 반복된 일상을 살아가는 그녀의 돌파구는 문학, 시에 대한 열정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리사의 시적 재능은 그리 높은 수준이 못된다. 동료 수강생들과 강사는 그녀의 시가 '어디선가 본 듯한 내용'이라는 일관된 평가를 내놓는다. 시를 좋아하는 이라면 그 뜻을 금세 눈치챌 수 있다. 리사의 시에 부족한 건 고민의 흔적이나 문학적 감수성이 아니다. 평범한 그녀가 시를 통해 자신의 특별함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심이 문제라면 문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욕심에서 비롯된 지적 허영은 시의 개성과 순수성을 갉아먹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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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리사는 유치원에서 다섯 살 지미의 중얼거림을 듣게 된다. 여느 아이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이던 꼬마가 내뱉는 말에 리사의 입은 딱 벌어진다. 지미가 중얼거리는 건 짧으면서도 강렬한, 운율마저 살아있는 완벽한 한 편의 시다!


Anna is beautiful.
Beautiful enough for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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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리사는 지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기울여 이 어린 천재가 중얼거리는 훌륭한 시들을 받아 적는다. 읊는 족족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지미의 재능은 그러나 리사 이외에 아직 알아주는 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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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영화는 리사의 일상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간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지적이고 생산적인 대화가 통하지 않는 가정 분위기에 지쳐있다. 물론 자상한 남편은 그녀의 시에 관심을 가져 주지만 그뿐이다. 하루는 부부가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며 서로의 몸을 더듬는데, 이때 걸려온 전화 한 통에 리사는 전희 대신 전화를 택한다. 수화기 너머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지미. 시가 떠오를 때면 선생님에게 연락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은 녀석이다. 속옷을 입고 부랴부랴 종이에 시를 받아 적는 리사와, 그 너머로 낙심한 듯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 남편의 모습에 관객들은 폭소를 터트릴 수밖에 없다. 여운이 남는 웃음이다. 시 한 편에 중단되는 섹스라니. 리사는 결국 옷가지도 권태도 억지로 벗어던지지 못한 채 시 한 편을 소중히 여긴 것이다.


블랙 코미디스러운 내용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리사는 시 수업에서 지미의 시를 마치 자신이 지은마냥 발표하고 이때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수강생들 사이에서도, 강사에게도 좋은 평을 들으며 리사는 지미의 재능을 더욱 확신하고, 그럴수록 집요하게 아이의 곁에서 시를 받아 적으려 애쓴다. 유치원 교사로서 아이의 능력을 살려주려는 모습과는 어쩐지 거리가 있어 보이는 그녀의 노력에 관객들은 점차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이스라엘 영화 <시인 요아브>를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34회 선댄스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떠오로는 신예로 주목받는 사라 코랑겔로 감독은 여성인데, 그래서인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리사의 복잡한 심리가 더욱 잘 표현되지 않았나 싶다. 많은 이들이 매기 질렌할의 인생작이라 여겼을 만큼 주연 배우의 훌륭한 연기가 뒷받침되었음은 물론이다. 권태로운 일상을 깨트려 준 어린아이의 천재성을 곁에서 지켜보는 40대 여성. 그녀가 느낄 법한 오묘한 심경이 훌륭한 여성 감독과 배우를 통해 더욱 완벽하게 표현된 것이다.


평범한 이의 시(poem)를 다룬 또 다른 영화 <패터슨>이 문득 떠오른다. 반복되는 일상과 소소한 에피소드, 무엇보다 주인공이 시를 아주 좋아한다는 점에서 닮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영화는 명백히 결이 다르다고도 할 수 있다. <패터슨>의 주인공 패터슨의 잔잔한 일상 속에서 시가 갖는 의미와, <나의 작은 시인에게>의 리사가 시를 통해 찾고자 하는 바가 어떻게 다른지는 특히 시를 좋아하는 영화 팬들이 직접 확인할 만한다. 지미의 재능을 만난 리사의 권태가 집착에 이르기까지. 이 정도 단서에서 궁금증을 느낀다면 꼭 한 번 영화를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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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um 영화 메인에 걸렸네요. 반가워서 시 한 편이라도 읊고 싶지만 시상이 도무지 안 떠오릅니다.

지미를 바라본 리사의 심정에 이렇게 한 번 더 공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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