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넘기 위해서는 논픽션이 필요하다.

영화 <논-픽션> 리뷰

by 차돌


영화의 시작과 함께 두 남자가 대화를 주고받는다. 주거니 받거니 빠르게 내뱉는 말들이 예사롭지 않다. 글 콘텐츠와 SNS, 자본의 논리 등에 대한 가볍지 않은 화제가 자막을 통해 빠르게 흐른다. 다행히 대화를 멈추고 식당으로 이동하는 등장인물들 덕분에 나는 잠시 숨을 고른다. 그제야 화면이 넓게 보이기 시작한다. 점심을 먹는 직장인들로 붐비는 프랑스의 작은 식당. 앉자마자 대화를 잇는 두 남자는 오래전부터 협업한 듯한 편집자와 소설가다. 소설가의 연애소설 원고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내는 편집자는 현실주의자로 보인다. 반면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책이 출간되기를 바라는 소설가는 이상주의자에 가까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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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논-픽션>은 <퍼스널 쇼퍼>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신작이다. 프랑스의 대표 배우 줄리엣 비노쉬, 기욤 까네 등 주연 배우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그 덕분인지 이 영화는 익숙한 상업 영화는 아니지만 흡인력과 재미가 충분했다. 기대하지 않은 곳곳의 지점에서 번뜩인 위트 덕분에 몇 차례 관객들의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코미디 장르로 봐도 좋을 정도로 유머러스한 영화였다.


그럼에도 <논-픽션>은 기본적으로 매우 진지한 작품이며, 등장인물들의 열띤 대화로 서사를 전개하는 '지적인' 영화다. 그리고 이 지적 대화는 우리의 현실과 매우 밀접하다. 화려한 연출이나 치밀한 스토리 없이도 관객들이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공감할 수 있는 이유다. 하나 더,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독립적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서로 은근한 관계로 얽힌 채 교류한다. 또한 이들은 저마다의 일탈과 욕망에 충실하기에 작품 전체에는 적당한 흥미와 긴장이 조성된다.




<논-픽션>이 대화와 관계를 통해 던지는 화두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는 출판 시장의 미래를 놓고 토론하는 성공한 편집자와 디지털 부서 책임자 간의 일과 사랑이다. 중년의 알랭(기욤 까네 역)은 나름대로 성공한 출판 편집자이지만 인쇄 서적이 아닌 e북, 오디오북 등에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시장의 동향과 회사의 수익을 고려해야만 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반면 젊고 유망한 로르(크리스타 테레 역)는 디지털의 성공을 단언하지만 그녀에게도 100%의 확신이나 애사심은 없다. e북으로의 전환을 기대한 시대의 예측이 엇나간 지표들이 드러나고 있어서다. 이 두 남녀의 관계는 그들의 커리어를 닮은 듯 열정적이면서도 쿨하다.


두 번째는 바로 영화의 제목인 '논픽션'과 관련 있는 주제다. 소설, 그중에서도 남녀관계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연애소설은 과연 픽션이기만 한가?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 녹아들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팩션(Fact+Fiction)이자 논픽션이 아닐까? 자신의 작품을 대중 앞에 내놓으며 작가는 허구인지 실제인지 모를 등장인물의 프라이버시를 어디까지 지킬 의무가 있을까? 찌질한 듯하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로맨티스트인 소설가 레오나르(벵상 맥켄 역)와 그의 아내 발레리(노라 함자위), 알랭의 아내인 셀레나(줄리엣 비노쉬 역)의 묘한 관계는 관객들이 이러한 질문들을 자연스럽게 품을 수 있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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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쉴 새 없는 대화를 접하고 나니 국내 영화 한 편이 문득 생각났다. 흔치 않은 '대화형' 코미디 장르로 흥행에 성공했던 <완벽한 타인>이다. 우연한 기회에 그 작품의 시나리오를 쓴 배세영 작가의 대담을 들은 적이 있다. 이탈리아 영화를 원작으로 하되, 다소 지루하고 건조한 원작을 뛰어넘어 국내의 정서에 맞게 각색한 영화가 바로 <완벽한 타인>이라고 했다. 이를 위해 그녀가 중점을 뒀던 건 등장인물, 즉 캐릭터의 설정이라고도 했다. 특색 있는 인물들의 매력과 코미디 요소가 잘 어우러진 덕분에 영화는 원작과 상관없이 기대 이상의 흥행을 거뒀다.


이와는 달리 <논-픽션>은 리메이크할 필요도 없이 국내 관객들에게 충분한 시사점을 제공하는 영화다. 출판시장의 미래라든지 작가의 삶 등 국적을 불문한 공통의 이슈가 영화 전반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물론 드라마 요소에 더 집중해서 본다면 우리의 보편적인 정서에 비춰 프랑스 영화의 남녀관계가 리버럴하게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국내 영화들 중에도 자유분방한(?) 작품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긴 하지만 대중과의 괴리로 인해 흥행에는 여전히 한계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 <논-픽션>은 우리에게 더 필요한 자극을 제공한다. 국내 드라마로 치자면 치정극인 상황에서도 비교적 담담하게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인물의 모습은 신선하다. 정치, 문화, 사회 이슈 전반에 걸쳐 첨예하게 대립되는 견해를 밝히면서도 상대방에게 얼굴을 붉히지 않는 대화방식도 그렇다. 악다구니 없이는 극이 진행되지 않는 국내 작품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막장'이라는 요소가 하나의 장르로까지 진화한 현실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그런 건 픽션으로만 존재했으면 한다.

현실을 잊기 위해 필요한 건 픽션일지 몰라도, 현실을 넘기 위해 필요한 건 논픽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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