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딜릴리> 브런치 무비패스 리뷰
<파리의 딜릴리>는 *컷아웃 기법의 천재 미셸 오를로 감독의 신작 애니메이션 영화다. 그는 <프린스 앤 프린세스>, <키리쿠와 마녀> 등으로 국내에 잘 알려져 있으며, 이밖에도 30여 편의 작품을 통해 세계 유수의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수상한 거장이다.
이 영화 역시 2018 앙시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 개막작, 2019 세자르 영화제 최우수 애니메이션으로 선정된 만큼 널리 인정받은 애니메이션이다. <파리의 딜릴리>는 **벨에포크 시대 아름다운 파리를 배경으로 다양한 랜드마크와 명사들을 2D와 3D를 넘나드는 화면에 담아냈다. 이를 위해 감독은 직접 촬영한 파리의 사진을 활용한 독특한 애니메이션 기법을 선보였는데, 자료 수집에만 4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하니 그 열정과 노력이 실로 대단하다.
특히 이번 시사회가 끝난 후에는 한기일 작가('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로 간 클림트'의 공동 저자)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관객들과 나누는 GV가 마련돼 있어서 좋았다. 미처 몰랐던 영화의 배경과 문화, 예술적 의의를 쉽게 알려준 그의 설명 덕분에 애니메이션 전체를 관통하는 인권과 양성평등 같은 주제 의식까지 톺아볼 수 있었다.
* 컷아웃 애니메이션(=절지 애니메이션)
종이 위에 형태를 그리고 잘라낸 다음 각각의 종이를 한 장면씩 움직여가면서 촬영하여 연속 동작을 만드는 애니메이션 기법.
** 벨에포크 시대
프랑스어로 흔히 ‘좋은 시절’ 혹은 ‘아름다운 시절’로 번역되며,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종결된 1871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인 1914년까지의 평화롭고 풍요로운 유럽의 한 시대를 일컫는 용어.
(출처 - Daum백과)
영화의 주인공 소녀 딜릴리가 당시(벨에포크) 유행했던 '인간 동물원'에서 일하는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다소 파격적(?)인 이런 장면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금세 경쾌하게 흐른다. 영리하고 귀여운 소녀 딜릴리가 파리에서 귀족 부인의 후견 하에 지낸다는 설정에 더해 또 다른 주인공 소년 오렐이 등장하며 스토리가 빠르게 진행되는 덕분이다.
이런 식의 애니메이션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인물과 배경이 컷아웃 방식으로 펼쳐지는 영상에 영화 초입부터 참신한 매력을 느꼈다. 이와 동시에 등장인물들이 쉴새없는 대화를 주고 받으며 진행되는 프랑스식 영화 특유의 속도와 저돌적인 내용 전개에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오렐과 딜릴리는 금방 친구가 되어 파리 곳곳을 자전거로 함께 누빈다. 때마침 시내 곳곳에서는 파리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범죄 소식이 퍼지고 있어 호기심 많은 소녀 딜릴리가 이를 놓칠 리 없다. 그것은 바로 '마스터맨'으로 불리는 수상한 집단이 어린 소녀들을 납치한다는 내용인데, 실제로 수상한 사내가 딜릴리에게도 접근하며 영화의 줄거리는 빠르게 가닥이 잡힌다.
이후의 내용은 정의감 넘치는 소년 오렐과 용기있는 소녀 딜릴리가 합심하여 마스터맨을 쫓는 과정으로, 어찌 보면 굉장히 단순하지만 그 안에는 다양한 볼거리와 인물 관계가 펼쳐진다. 파스퇴르, 피카소, 로댕, 모네, 드뷔시, 르누아르, 퀴리부인 등 당대 파리의 유명인들을 기발하게 연관시킴으로써 스토리를 끌어가는 것이다.
카나키에서는 나를 프랑스인이라더니, 여기선 나를 카나키족이라고 하네?
다시 처음의 설정으로 돌아가 보면, 딜릴리는 순혈 프랑스인이 아닌 혼혈 흑인 아이다.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뉴칼레도니아의 카나키에서 온 그녀는 백작 부인의 보살핌으로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하며,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기 보다는 주위의 모든 편견을 무시하는 당찬 소녀다. 너무 검지도, 희지도 않은 자신의 피부색을 두고 이러쿵 저러쿵 하는 이들을 '멍청하다' 고 말하는 딜릴리의 유쾌한 대사들은 귀여우면서도 신랄하다.
딜릴리와 오렐은 마스터맨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많은 조력자들을 만나는데, 그 중에서도 중심적인 인물은 바로 '엠마 칼베'다. 당대를 풍미했던 소프라노인 그녀의 목소리는 세계적인 성악가 나탈리 드세이가 맡았으며, 관객들은 영화를 통해 엠마 칼베를 연기한 그녀의 아름다운 노래도 들을 수 있다.
감독 미셸 오를로는 실제로 유년기를 아프리카에서 보냈다고 한다. 때문에 그의 많은 작품들의 저변에는 직접적인 경험에 기반한 흑인들의 모습과 인종 문제에 대한 의식이 깔려있고, <파리의 딜릴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더해 이번 작품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주제는 바로 '양성평등'의 문제이기도 한데, 이는 범죄집단 '마스터맨' 의 비밀을 파헤치는 영화의 후반부에 여실히 드러난다.
GV를 통해 간략하게나마 프랑스 애니메이션에 대해 살펴볼 수 있었다. 스머프, 아스테릭스, 땡땡의 모험, 베카신 등 익히 유명하거나 영화화 등을 통해 최근에 다시 조명되고 있는 작품들을 확인한 것이다. 꼬마 니콜라와 장자크 상페를 아주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러한 프랑스 애니들이 더욱 친숙하게 느껴진다. 이제는 <파리의 딜릴리>를 통해 미셸 오를로 감독에게도 전보다 큰 관심을 갖게 됐으니, 이야말로 문화의 힘이 아닐까. 덧붙이자면, 최근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만든 또 하나의 걸작 <설국열차> 원작 또한 프랑스 만화였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아무튼 <파리의 딜릴리>가 독특한 애니메이션이었던 건 분명하다. 어쩐지 프랑스 박물관의 홍보용 어린이 영화 같다는 느낌도 들었으나, 이는 결코 나쁜 의미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특이한 기법의, 계몽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프랑스 애니메이션이 일본, 미국식 애니메이션에 익숙한 이들에게 차별성 있게 다가갈 수 있는 지점은 독창성과 명확한 주제의식일 테고, <파리의 딜릴리>는 그 역할에 매우 충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