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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돌 Sep 17. 2019

토익 스토리

나는 토익이 싫어요




# 카페에서


  카페의 테이블석에 앉는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타인과 마주 보기 어색하여 대각선에 자리를 잡는다. 동시에 슬쩍 그쪽을 살핀다. 젊은 여성이 책을 펴놓은 채 고개를 파묻고 있다. 더 쳐다보면 부담스러울 거리인지라 무심한 척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자리를 세팅한다. 코드를 꽂고 전원을 켜자 금세 화면이 펼쳐짐에 나의 시선은 정착한다. 이로써 나와 그녀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칸막이가 생겼다. 그녀는 계속 공부를 하고, 나는 마우스를 딸깍거리기 시작한다.


  달그락,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에서 얼음이 저 혼자 소리를 낸다. 서너 번쯤이나 빨았을까, 뭉텅 줄었던 커피는 얼음이 녹아들어서인지 양이 조금 늘은 것도 같다. 그제야 시계를 보니 오십 분쯤이 지나 있다. 화면에서 눈을 떼고 주위를 천천히 다시 살핀다. 언제부터였는지 옆옆 자리에는 어린 커플이 나란히 앉아 재잘거리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테이블 너머 여성은 여전히 책에 파묻혀 있다. 때마침 그녀가 책을 집어 들며 뒷장 어딘가를 살피느라 표지가 드러난다. T.O.E.I.C.  다섯 글자가 뚜렷하다. 

      


  

# 대학생


  너 토익 봤어?
  아니 아침에 못 일어났어ㅋㅋㅋ
ㅋㅋㅋㅋ 거봐라 어제 술이나 더 먹을 걸 그랬잖아


  시험 신청조차 하지 않은 내가 번번이 승자였다. 하지만 그것도 2학년 말까지였다. 언제부터인가 다들 주말 아침에도 성실히 일어나 토익 점수를 따내는 거였다. 나는 꽤 오래도록 버티며 시험을 안 봤다. 일찍이 동참하지 않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오기마저 생겼다. 왜 내 돈을 내고 영어 시험을 봐야 하지? 그것도 문법 시험을? 간혹 엉뚱한 데서 삐딱선을 타는 성격 탓인지 토익이란 녀석이 갈수록 얌체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도 별 수 없었다. 뭐든 '지원'하려면 어김없이 토익 성적이 필요했다. 단지 학교를 졸업하기 위해서도 일정 점수 이상의 토익 성적은 필수였다. 결국 나는 학교 어학원의 토익 수업을 신청했다. 주위에서 다들 추천했다. 토익 독학은 미련한 거고 전문 강사의 수업이 효과적이랬다. 그래, 시험 몇 번 볼 돈이면 차라리 강의를 듣고 빨리 끝내자 싶어서 꾀를 부려보기로 했다. 토익 수업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예상한 이상으로 단순하면서도 기계적이었다. 영어를 배우는 게 아니었다. 토익은 오로지 '비법'이라며, LC에도 답을 찍는 공식이 있었고 RC에도 공식이 있었다. 이게 영어인지 수학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 취준생


  어영부영하다 보니 성적 만료 기한 2년이 지나버렸다. 자소서 쓰기도 바빠 죽겠는데 토익 공부가 또 웬 말이람. 취업 스터디 친구들의 추천을 받아 종로로 갔다. 노느라 오갈 땐 학원도 회사 건물 같아 보였는데 이럴 수가, 나만 빼고 다 여기서 수업을 들어온 것 같았다. 되게 유명한 강사의 단기 고득점 코스를 선택했다. 수업 한 시간도 전부터 학원 복도와 계단에는 수강생들의 줄이 길었다. 맙소사 맙소사 하면서 나도 어느새 그 대열에 있었다. 굴종과 타협의 느낌은 이미 몇 년 전에 받았다. 뭐 대단한 지조를 세운다고 내가 토익에 대항하랴. 어차피 해야 할 거면 보다 빠르게, 보다 고득점을 위하여!


  학원 시스템에는 스터디가 필수였다. 공무원을 준비하는 동생, 취준생 1년 차 형, 2년 차 누나 등등. 저마다의 이유들이 절박했기에 토익은 더더욱 중요했다. 내가 보기에 토익이 문제는 아니었건만, 다들 일단 토익 점수를 잘 받으면 한시름 놓는 분위기가 당연했다. 그들이 보기에 난 어떠할까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넋 놓고 있다 보니 기간이 만료돼서 학원에 왔다며 헤헤거릴라치면 전에 몇 점을 받았냐는 질문을 받았다. 왜였는지 난 실제보다 15점을 더 높게 불렀다. '와~ 조금만 더 공부하면 되겠네요!'란 친절한 답변에 얼마간 위안까지 얻었다. 딱히 공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꽤 성실하게 '스터디'를 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 직장인


  첫 직장에 그럭저럭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딱 내 토익 점수랑 비슷한 수준이었달까. 더 좋은 기업에 붙은 녀석들에 비하면 꽤 모자라기도 했지만 그런대로 만족했다. 적잖이 지쳤기 때문이다. 스펙을 아쉬워한들 이미 뒤로 놓인 대학 시절은 돌아올 리 없었고, 돌아오지 않을 대학 시절을 회상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면 취업의 문은 좁아지고 있었다. 닫히기 전에 얼른 통과해야만 했다. 그렇게 난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만족하며 취업의 문을, 토익의 문을 쾅 닫고는 오랜만에 안심했다.


  몇 해 뒤 이직을 했다. 토익 점수 같은 건 필요 없는 스타트업이라서 꽤나 마음에 들었다. 어차피 내 성적은 또 만료돼 있었고, 다시 딸 생각은 전혀 없었다. 대신 난 첫 직장 부근의 회화 학원을 다니는 중이었다. 1년 치 수업료를 한꺼번에 내고 자유롭게 수업을 신청해 듣는 방식이었다. 잦은 야근에 수업료 본전도 못 건지던 차에 이직한 회사의 위치가 멀어 나는 환불을 받기로 했다. 수강 기간은 반년쯤 지나 있었다. 수강 때는 적용되던 할인 요율이 환불 차감 때는 적용되지 않아 돌려받을 돈은 터무니없이 적었다. 차라리 토익 학원이나 두어 달 다녀서 점수를 따 놓을 걸 그랬나, 처음으로 그런 후회를 다 했다. 대기업 이직이라는 선택지를 고려조차 안 했던 건 어쩌면 토익이 너무 싫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 다시 카페


  커피잔이 바닥을 드러냈다. 사실 조금 남았는데 하도 밍밍해서 더 마시기 뭐한 맹탕이다. 토익 덕분에 과거를 훑으며 멍을 때렸더니 얼음이 많이 녹았다. 슬쩍 맞은편의 토익녀(?)를 본다. 이번엔 얼굴까지 살핀다. 기분 탓일까, 아까는 몰랐는데 표정이라는 게 별로 없어 보인다. 어떤 공부가 그리 즐겁겠냐마는 이렇게까지 무표정할 수 있나 싶을 정도다. 법학 책을 보던 어떤 남자의 진지함도, 대학 과제로 보이는 프린트물을 넘기던 어느 학생의 풋풋함도 그녀에게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드르륵, 문득 그녀가 몸을 일으켜 의자 소리가 난다. 화장실에 가는 것 같다. 그녀가 아래층으로 사라지자 나는 전보다 자세히 토익 책을 들여다본다. 익숙한 형태의 단락마다 영문자들이 빼곡하다. 거꾸로 보느라 대강의 독해도 안 되지만 자세히 봐도 전혀 모를 것 같다. 어떻게 내가 저걸 다 풀었나 싶은 걸 보니 오래되긴 오래된 기억이다. 으, 벌써 또 지겹고 갑갑한 마음이 든다. 이상하리만치 토익이 꾸준히 싫은 거다.(YBM과는 어떠한 악연도 없습니다만)


  그녀가 자리로 돌아온다. 학생인 듯 취준생인 듯, 그도 아니면 직장인인 듯한 무표정한 얼굴. 나이가 통 짐작 가지 않는 그녀에게서 왠지 모를 권태가 느껴진다. 이것도 기분 탓이려나. 괜히 빨대를 한 번 쭉 빨아 밍밍한 물을 삼키며 나는 더 이상 토익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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