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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돌 May 10. 2019

조카에게는 파랑 점퍼를 꼭 선물해야겠다.

30년 전 여동생의 탄생과, 30년 후 여동생의 출산.



나는 다섯 살이었다.


이른 새벽 아빠 손에 이끌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던 특별한 하루가 있었다. 아주 오래된 기억이나마 당시의 느낌만은 생생하다. 파아란 잠바, 그 무렵 내가 잘 입던 - 어린 시절의 사진들 몇 장에서 난 그걸 입고 있다 - 슥삭거리는 소리가 늘 새 옷 같던 파랑 점퍼를 입혀주며 아빠는 내게 말씀하셨다.


혁아, 곧 동생이 태어난대. 엄마 병원으로 가자.


이렇게 남아있는 기억의 흔적이 강렬한 건, 전혀 생각나지 않는 전후의 상황들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만은 유독 생생하기 때문이다. 파랑 옷 너머로 들려오던 아빠의 음성과, 졸린 눈을 비비며 쳐다본 아빠의 큼직한 얼굴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새겨져 있다. 아빠는 신이 난 것 같기도, 조금은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 덕분에 왠지 모를 기대감에 휩싸였던 다섯 살 꼬맹이는 삼십 년이 지나도 추억할 수 있게끔 기억을 소중히 저장해 뒀나 보다.


그날 내게는 여동생이 생겼다.





얼마 전 주말의 이른 아침이었다. 엄마의 전화벨이 울렸다. 우리 식구는 각자 잠결에 직감했다. 출산 예정일을 일주일쯤 앞둔 내 여동생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신통하게 주말을 골라서 나온다며, 부모님과 난 분당의 한 산부인과로 서둘러 갔다. 동생은 생각보다는 멀쩡한(?) 상태로 짐볼 위에 앉아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지근거리에 사는 덕분에 자주 보아온 만삭 여동생의 커다란 배는 새삼스럽지 않았다.


양수는 터졌는데, 자궁이 아직 많이 열리진 않았대.


나는 양수란 게 터지면 바로 출산을 하는 줄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느새 아빠가 된 친구 녀석들에게 많은 얘기를 들은 편이긴 하나, 막상 출산을 코앞에 둔 여동생을 통해 알게 되는 것들은 그렇게 모두 새로웠다. 


뭐야 너 괜찮네? 애는 언제 나올지 아직 모르는 거고?


오빠랍시고 동생에게 기껏 내뱉은 말은 지금 생각해 보니 형편없기는 했다. 사실 끙끙대는 녀석을 볼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조금은 다행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급히 집을 나서느라 부스스하게 짐도 제대로 못 챙겨 나온 매제가 집에 다녀올 동안, 산모는 친정 식구들이 돌봐 주기로 했다. 마침 류현진 선발 경기의 중계가 시작되던 참이라 아빠와 나는 TV를 틀었다. 엄마는 시끄럽다며 끄라고 했지만 정작 동생은 괜찮다면서 심호흡을 몇 번 더하는 거였다.




근처 분식집에서 점심을 간단히 먹고 오니 동생의 산통은 더 심해져 있었다. 계속 곁에 있기가 안쓰러울 정도로 아파하는 딸과 여동생을 위해 아빠와 오빠는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따금 검진을 오는 간호사 분들의 요청에 의해 보호자들은 방 밖으로 나가야 했으므로, 어느 순간부터 나는 아예 복도에 머무르고 말았다. 생전 처음 내지르는 동생의 비명을 과연 오빠가 들어도 되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당황스러운 시간이 이어졌다. 


무통 주사를 맞고도 한참을 힘겨워하는 산모가 언제쯤이나 분만실로 옮겨지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유명인들도 많이 다녀갔다는 대형 산부인과의 분업 시스템에 신뢰가 가기는 했지만, 옛날과는 워낙에 달라진 병원 환경에서 정작 우리 엄마도 분만 과정이 원래 이렇다 라고는 확언하지 못하는 시간들이었다. 그래도 얼핏 듣기로 자궁문은 몇 센티 몇 센티 점점 열리고 있기는 했다. 참으로 힘겹게도 열리는 문이었다.

    




분만실이 분만 대기실 너머 문 하나만 열고 들어가면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내가 생각했던 건 반도체 공장처럼 마스크와 장갑을 낀 사람들이 있는 격리된 공간이었는데. 마침내 휠체어를 타고 분만실로 들어간 동생과, 이윽고 환자복 같은 걸 걸치고 따라 들어간 매제의 모습까지 지켜볼 수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응애~ 응애~


이런 의성어 말고는 달리 표현할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아빠와 난 그 소리를 듣고 시각을 체크했다. 오후 1시 10분이 조금 넘어서 그렇게 아빠 엄마는 서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걸 축하했고, 나는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흐뭇함을 느꼈다.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분만 대기실에 있던 짐들을 전부 챙겨서 나왔다. 생각보다 빨리 신생아를 구경할 수 있어서 또 한 번 신기했다. 다들 그렇게 정신없어하다가 이윽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입원실로 갔을 때는 이미 산모가 안정을 취하고 있는 상태였다. 


어? 생각보다 상태가 괜찮은데? 


고생했다, 축하한다 등등 엄마 아빠가 동생을 축복하는 가운데 오빠랍시고 내뱉은 말은 역시 돌이켜 보니 멋이 없기는 했다.





이렇게 30여 년의 세월을 두고 나는 여동생의 탄생까지 떠올리며 녀석이 아이를 낳은 얼마 전의 일을 기록해 본다. 원래대로(?)였다면 내 아이의 출산을 동생이 먼저 접했어야 하겠지만, 먼저 결혼을 한 녀석이라 자연 분만에도 앞장서서 오빠가 지켜볼 수 있게 해 준 게 기특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뭐 그렇다. 


조카의 태명은 씽씽이였다. 이제 이름도 지어졌으나 굳이 그것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다. 옛 어른들이 말하길 애한테 너무 이쁘다 이쁘다 하면 삼신 할매가 샘내서 안 좋다더니 그 의미를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요즘같이 엄마들이 직접 SNS에 아이 사진이며 자랑을 하는 시대에 내가 촌스러운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여기 올리는 사진들도 지레 여동생한테 허락을 받고 사용하는 나다.



꼬물꼬물 잘 자라고 있는 조카의 모습은 동생이 카카오톡 가족 채팅방에 자주 올려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퇴근길에 잠시 동생네 집에 들러 녀석을 만날 수 있다는 건 굉장한 행운인 것 같다. 역시 가까이 살아야 좋다. 


몇 년 후면 나는 조카에게 녀석이 태어났을 당시의 일들을 자기 엄마가 태어났을 때보다 훨씬 생생하게 전해줄 수 있겠지. 그러고 보면 또 다음 30년 후에는 조카의 아이가 태어나는 걸 보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그때도 역시 가까이 살아야 좋을 것 같다. 


문득 30년 전 동생이 태어난 날의 장면이 또 떠오른다.

조카에게는 파랑 점퍼를 꼭 선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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