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냐
* 결정적 스포는 없으나 내용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세상의 빛처럼 밝게 표현되던 기존의 영웅들과 달리, 그의 내면은 고독하고 어둡기에 낮보단 밤이 어울렸다. 다만 그는 어둠으로 어둠을 몰아내고자 했다. 선과 악의 경계조차 모호해진 혼탁한 세상에서 '어둠=악(惡)'이라는 통념을 깨트린 정의의 사도는 바로 다크나이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재창조한 배트맨은 그렇게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히어로 무비의 새 지평을 열었다.
어둠을 틈타 범죄를 저지르는 흔한 악당들과 달리, 그는 대낮에 살인을 저지르고도 킬킬킬킬 웃어댄다. 악행에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그야말로 싸이코패스의 전형이다. 동이 트는 환한 하늘 아래 계단을 내려가며 춤추는 그의 광기는 '빛=선(善)'이라는 통념을 깨트렸다. <조커>, 토드 필립스 감독이 재창조한 악당 조커는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의 성과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가히 역작이라 할 만하다.
얼마 전 개봉일에 <조커>를 보고, 며칠 뒤 2회 차 관람을 했다. 쏟아지는 세간의 평을 보고 나서 영화를 다시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첫 관람에서 받은 충격이 가라앉자 새삼 눈에 띄던 건 아서(조커의 본명)가 웃는 순간들이었다. '코미디는 주관적인 거잖아' 라던 영화 후반부 조커의 대사가 비로소 이해될 듯했다. 아서는 남들이 웃을 때 안 웃고, 남들이 안 웃을 때 웃곤 했다. 시도 때도 없이 킬킬대는 줄로만 알았던 그는 사실 남과 다른 포인트에서 웃었기에 정신병으로만 여겨졌던 게 아닐까란 의문이 들었다.
조커가 되기 전 아서는 두드려 맞아도 견뎠고, 정신 치료 약도 복용했다. 또한 그는 코미디쇼의 '조크'들을 노트에 메모하며 남들을 따라 웃거나, 혹은 남들을 웃게 하는 법을 배우려고도 했다. 그 자신이 느끼기에 삶은 비극일지언정 어머니로부터 교육받은 대로 '해피'한 삶을 추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서의 노력은, 그를 둘러싼 환경은 너무나 위태로웠다. 동아줄의 올이 하나 둘 나가다 마침내 모조리 투두둑 끊기듯, 광대 아서는 순식간에 악당 조커가 돼버렸다.
영화 <조커>가 배우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와 감독 토드 필립스의 연출이 빚어낸 수작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를 모두가 좋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모방 범죄에 대한 우려라든지,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찜찜하고 음울하게 극대화한 데 대한 거부감을 표하는 의견들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함께 본 지인들 중에도 그런 이들이 있었고, 나 역시 그 지점에도 공감하는 바가 있다.
'영화는 영화다'라고 하기에 이 영화는 너무나 섬세하고 설득력 있게 악당의 울분을 드러냈기 때문이리라. <조커>를 통틀어 아서-조커가 살해한 인물의 수는 <다크나이트>의 조커가 초반부터 동료(은행털이 범죄자)들을 죽여나간 수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다만 히스 레저의 조커는 말 그대로 처음부터 '미친놈'이었고,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는 아서였다가 서서히 변해가는, 그러다 순식간에 악당 조커가 '되어 버리는' 과정을 거친다. 뛰어난 미장센과 BGM, 배우의 신들린 연기로 인해 영화에 몰입할 수밖에 없는 관객들로서는 조커의 단죄를 기다리기는커녕, 그가 '왜 악당이 되는지'에 공감해 버리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설정에 공감하는 것과 진실을 규정하는 건 엄연히 다르다. 히어로 코믹스의 세계관, 캐릭터를 내세웠다 한들 이 영화를 '히어로 무비'로 분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조커는 세상을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는 영웅이 아니라 혼돈으로 이끄는, 혹은 혼돈에 편승한 악당이기 때문이다. 아서의 불우한 처지가, 계속된 불행이 그를 범죄자로 만들었다고 이해하더라도 비슷한 처지의 모두가 살인을 저지르는 건 아니지 않은가. <다크나이트>는 어두운 배경과 브루스 웨인의 고뇌에도 불구하고 히어로 무비인 반면, <조커>는 눈부신 연출과 조커의 희열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범죄 무비다. 이러한 규정을 확실히 하고 작품성을 논할 때라야 비로소 이 영화는 명작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고담은 가상의 도시이나 그 체제와 환경은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다크나이트>와 <조커>를 본 사람들은 다 안다. 브루스 웨인과 아서가 각기 타고난 환경이 얼마나 다른지를. 이미 가진 모든 걸 내던져서 배트맨이 된 브루스의 슈퍼 파워도 결국 그의 부유함에 기반하지 않던가. 때문에 이번 영화 <조커>에서 아서가 잠시 웨인이기를 꿈꾸다가 직면한 좌절감에 더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는 조커가 꿈에 그리던 '머레이 쇼'에서 머레이의 호의 아닌 조롱에 자극받은 지점과도 맞닿아 있다.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땐 참고 참던 내면의 분노가, 잠시 꿈꾸던 희망이 사라지자 폭발해 버린 심리 말이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이러한 과정을 치밀하게 보여주는 자체가 어떠한 가치 판단 이전에 하나의 메시지이자 경종이 될 수 있다고 본 게 아닐까.
별종 조커는 단 하나의 캐릭터이지만,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아서들이 존재한다. 영화 <조커>가 조커의 광기를 이해시키는 영화가 아니라, 아서의 울분을 돌아보게 한 영화로 의의를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