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서 미안하지는 않기로 해.
되도록 미안하지 않으려고 신경 썼기 때문이다. 때론 내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남에게 미안하지 않으려고 한 나는 그러나 정작 가까운 이들에게만큼은 종종 미안했다.
부모님께 미안했고, 친한 친구에게, 또 애인에게 미안했다. 미안함을 모르고 굴던 작은 행동조차 미안함을 알고 난 후엔 크게 미안해져 버렸다. 상대의 서운함을 알아채고도 재빨리 사과하지 못해서 더더욱 미안했다. 성격 탓인지도 몰랐다. 나 혼자 미안할 때완 달리 사과를 통해 미안함을 드러내기란 어쩐지 쑥스러웠던 것이다. 언제 다시 볼 지 모를 타인이 아니라 언제든 볼 수 있다고 여겨지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랬다. 그렇게 내가 혼자만의 미안함을 차곡차곡 쌓을수록 사랑하는 이들에겐 나에 대한 서운함이 쌓였을 테다.
마침내 사과를 해야겠다 싶을 땐 이미 늦은 경우가 많았다. 나는 미안함에 지치고 그는 서운함에 지쳐 우리 사이는 더 이상의 미안함이나 용서, 심지어 갈등조차 무의미한 멀고 먼 관계가 됐기 때문이다.
말로, 글로 밥을 먹으려다 보니 말이 지닌 힘을 믿지만 그만큼의 허망함에도 민감한 편이다. 그리하여 나는 말뿐인 사과가 효용이 없단 판단이 들면 행동으로 보여주기 전엔 말도 꺼내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다. 이는 어찌 보면 진정성이 있다고도 하겠으나 미련한 결벽이기도 했다. 바라는 게 그저 사과의 한 마디일 수 있던 상대방에게 사과의 말 없는 이의 우직함이 어디 통했겠는가. 설령 상대가 말뿐인 사과는 원치 않았다 할지라도 당장의 사과조차 없는 이에게 행동의 변화를 기대할 리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나의 미안함은 미련함 때문에 커져만 갔다.
느닷없이 사례 없는 미안함을 논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소개하기 힘든 개인적 사례의 미안함이 너무 컸던 나머지 그걸 또 혼자 끙끙대다 글로나마 풀고자 함이다. 말은 이미 놓쳤으니, 글을 통해서라도 미안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요즘의 난 그래서 주변 이들에게 권한다. 정말 미안한 사람이 아직 곁에 있다면 서둘러 미안함을 드러내라고. 감사함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겐 그보다 먼저 해결할 미안함이 있을 거라고.
미안해서 더 이상 미안하지는 않기로 한 어느 날, 놀랍게도 내 안에 감사한 마음이 가득 차 있길래 진작 그걸 꺼내지 못해 또 미안한 마음에 이 글을 써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