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만 했네
때때로 너는 잠시만, 하며 나를 세워둔 채 옷을 구경했다. 간혹 내가 여자 옷 가게들 뿐이라며 투정해도 넌 대꾸 없이 매장을 둘러보곤 했다. 몇 벌의 옷을 집었다 놓았다 해도 사지는 않고 나오는 게 보통이었다. 여자들은 옷이 많든 적든 부족하다던데, 너 역시 그랬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네게는 옷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홀로 걸을 때도 나는 옷들을 보며 너를 떠올렸다. 티셔츠든 스웨터든 색만 산뜻하면 다 너와 잘 어울려 보였다. 간혹 사줄까 하고 전화로 물으면 너는 사지 말라고 말리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난 너의 말을 참 잘도 들었다. 안 입을 걸 사봤자라는 확실한 이유에서였다. 스스로를 위해서든 나를 위해서든 괜한 지출은 삼가는 네가 무척 좋기도 했다.
아마 그게 문제였을 것이다. 머리로만 생각했던 나는, 정작 함께 옷 가게에 들를 때면 피곤한 티를 내며 너를 서운케 했다. 중요한 건 숨겨진 마음이 아니라 보여준 모습이었음을 나는 이제 안다. 상상 속의 무수한 선물 따위가 아니라 이따금 드러낸 나의 행동이 네게는 나의 실체였을 텐데. 내 마음에 만족해 정작 너를 만족시키지 못한 나 자신을, 그때의 너보다 지금의 내가 더 탓한다.
어제는 길을 걷다가 연보라 스웨터를 보았다. 문득 네가 떠올라 급히 발걸음을 옮겼지만 한동안 생각이 날만큼 아주 예쁜 옷이었다. 늦었지만 이제는 되도록 말하려 하기에 마저 밝힌다. 사실 너에게 직접 물을 때 말고도 나는 네가 새 옷 입은 모습을 자주 떠올렸었다. 실제로 옷을 사느냐 마느냐와는 상관없이 내가 선물한 옷을 입은 너를 상상하면 혼자서도 웃음이 났다.
생각만 하거나 마음에 두면 나중에 아쉬움만 남더라. 써 놓고 후회할지언정 속으로 썩히는 일보단 낫겠지 싶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떤 날에는 아이보리 후드 티를 보면서, 또 어떤 날엔 노오란 에어팟 케이스를 보며 나는 습관처럼 너를 떠올리고 말았다.
왜 내 양말은 같이 안 샀냐고 투정하다가 다투기도 하던 우리의 날들이었다. 어리진 않았지만 우린 어렸다. 너에게든 나에게든 이유가 없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나는 나를 아쉬워할 뿐이다. 똑같이 투정하더라도 조금 더 착하게 할 걸, 못난 심보다 싶으면 한 번 더 참을 걸 그랬다. 너에게 옷을 사주지 않고도 마치 사 준 것처럼 굴지 말았어야 했다.
과거에 마음 좀 썼다며 연연하고 생색내지 않으려 한다. 옷 가게에서 아무리 예쁜 옷을 봐도 너는 더 예쁜 걸 입고 있으리라 여기려 한다. 여자 옷 가게가 남자 옷 가게보다 많기로서니, 그걸 두고 삐죽대는 놈은 되지 않으려 한다.
지금 생각해 보니 너는 연보라 스웨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