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독후감탄

호기심보단 용기를 긁어모을 시간

하루키, <태엽 감는 새>

by 차돌


호기심이라는 것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금방 사라져 버리지. 용기 쪽이 훨씬 먼 길을 가야 한다구. 호기심이라는 것은 신용할 수 없는, 비위를 잘 맞춰 주는 친구와 똑같지. 부추길 대로 부추겨 놓고 적당한 시점에서 싹 사라져 버리는 거야. 그렇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혼자서 자신의 용기를 긁어모아 어떻게든 해나가야 한다구.

- 무라카미 하루키 <태엽 감는 새>1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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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폭이 넓은 편이라고 자부한다.

신중한 성격임에도 엉뚱하고 다양한 일들을 꽤나 겪었다. 나이 먹을수록 호불호는 확실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불호(不好)보다는 호(好)를 늘려가며 풍요로운 사람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해 왔다.


비결은 왕성한 호기심 덕분이다. 재미에 대한 욕구와 새로운 인연에의 갈망이야말로 두려움이나 신중함 앞에 주저하지 않고 낯선 경험도 편견 없이 받아들이게 한 원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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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혼란스러울 때도 있었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다가 지칠 무렵이면 특히 그랬다. 한 우물을 파라는 옛말 앞에 내가 파 놓은 얕은 우물들을 돌아볼 때면 '과연 잘해오고 있나'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무언가 제대로 이루려 할 때 결정적인 무기는 경험의 양보다 질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조차 내겐 새로운 호기심의 대상이라 그 자체를 깨닫고 만족하는데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루키가 정의한 호기심과 용기의 차이가 나를 새로이 자극한다.

그러고 보니 호기심만으로 시작한 일들은 대개 오래가지 않았다. 새로운 도전을 부추겨 놓고는 결정적인 순간 책임을 다하지 않은 호기심들 가운데 이제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것들도 꽤 많다.


그래서 생각한다. 이제는 진짜 용기를 긁어모을 때가 아닌가 하고. 호기심은 호기심일 뿐이란 걸 조금은 더 명심해야겠다고. 20대에 호기심으로 시작한 일들의 결과와, 30대에도 여전한 호기심으로 새롭게 벌인 일들의 결과를 놓고 보면 책임의 무게가 확연히 다른 걸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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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여전히 왕성한 나의 호기심을 사랑한다.

이런 성향 자체를 억누를 생각은 결코 없다. 벌써부터 나이 혹은 책임질 것들을 핑계로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야말로 젊은 꼰대의 길 아니겠는가.


다만 용기를 더 내리라 다짐할 뿐이다. 호기심을 꾸준히 충족하며 먼 길을 가려면 필요한 게 다름 아닌 용기임을 하루키의 소설이 내게 일깨워 준 듯하다. 홀로 책임지고 싶은 것들이 비로소 확실해지는 요즘인지도 모르겠다. 왕성한 호기심을 감당할 용기를 긁어모으는 것이야말로 내 남은 30대의 태엽을 잘 감는 일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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