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 수 없음에 대해 써 보기
한동안 글이라고 할 만한 글을 제대로 끄적이지 못했다. 떠오르는 화두가 있어도 길게 풀어낼 힘이랄까, 의지 같은 게 도무지 솟아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론만 풀어놓고 전개시키지 못한 글을 몇 개씩 두고도 나는 그러나 완성하려는 노력을 크게 기울이지 않았다.
바빴다...라는 핑계를 댈 정도로 바쁘진 않았다. 밤샘으로 원고를 마무리할 때도 있었으나 늘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마저도 낮에 운동을 하거나 카페에서 노닥거린 대가였을 뿐, 치열한 프리랜서라고 할만한 입장은 못 되었다. 변명의 여지없이 내게 글 쓸 시간은 충분했다.
생업을 위한 글쓰기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각종 상품의 판매 페이지를 기획하고 에디팅 하면서, 소위 '말랑한' 글을 쓸 시간과 여유는 줄어들었다. 아무리 봐도 끄적임이 중단된 시점은 그렇다.
내게 에세이는 여전히 낭만이었고 생업은 여전한 현실이었다. 현실 앞에 낭만은 대개 무력했다. 언제까지고 에세이를 생업에 우선할 수 없었다. 누가 그랬던가,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커피를 줄여야만 했다고. 내 기분이 그러했다. 에세이를 쓰면 쓸수록 입맛도 썼다.
그전까지 허공에 점점 뜨는 듯하던 내게 상업 에디팅의 확실한 과업과 보상은 땅에 발 딛는 감각을 다시 일깨웠다. 하지만 현실의 무게감과 더불어 나는 이제 무엇을 끄적이든 무력감 또한 느껴야 했다.
좋은 에세이란 무엇일까. 탁월한 글쓴이들의 에세이에는 형식 아닌 형식이 있고, 메시지 아닌 메시지가 있으며, 감성을 자극하는 울림이 존재한다. 주제도 개성도 뚜렷하므로 책으로 엮어 내기에도 좋다. 엮기 좋은 글은 읽기 좋을뿐더러 많은 이들의 공감을 자아내기 쉽다.
읽기 쉽고 공감까지 자아내는 에세이는 잘 팔린다. 출판 시장이 녹록한 건 아니지만 안 팔리는 책보다야 잘 팔리는 책이 좋은 건 확실하다. 글이 생업이 될 때 낭만은 비로소 현실과 맞닿는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나는 단계를 뛰어넘는 조바심을 부렸던 듯하다. 에세이로는 낭만을 말하면서 기실 잘 팔리는 글을 부러워하며 현실 탓을 했던 것이다. 현실 뒤에 숨는 낭만은 더 이상 낭만이 아니다.
어떤 것을 선택할 때 혼자만의 만족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느냐 하는 부분이 가장 어렵습니다.
그런 고민이 없는 선택은 자기만족으로 끝나버립니다.
<일상의 악센트>, <좋은 감각은 필요합니다>의 저자 마쓰우라 야타로가 말했다. 스스로 만족하는 에세이에 의구심을 품다가 일순간 지친 나를 일깨우는 말로 다가왔다.
<밥벌이의 지겨움>을 멋들어지게 쓴 노 작가(김훈)의 에세이도 떠오른다. 어쨌든 지금 이렇게 생업이니 낭만이니 다시 끄적일 수 있는 건 그런 분들의 덕이 아닐까 한다. 소소한 창작이나마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모방에서 비롯됐을 테니까. 그분의 에세이가 잘 팔릴 수밖에 없는 건 이처럼 나 같은 이들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는 행복과 영감을 주는 덕인가 보다.
그래, 팔리는 걸 고민할 단계가 아니었다. 만족에 대한 고민이 필요했다. 그래서 더는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말고 이쯤에서 갈무리해야겠다. 어느새 또 자기만족 중인 것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