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들이 뭐 이래?

희한한데 끝까지 보게 되는, <엄브렐러 아카데미> 주행중 감상평

by 차돌


1.jpg


집콕의 시대. 유튜브 리뷰 영상에서 넷플릭스 정주행으로 이어지는 알고리즘(?)이 어김없이 작동했다. 한날한시에 기이한 방식으로 탄생한 아이들이 입양되는 이야기, 교복을 입고 가면을 쓴 그들이 저마다의 슈퍼파워로 악당을 무찌르는 화려한 연출, 덧붙여 내레이션으로 예고되는 '세상의 종말'. #슈퍼파워 #성장스토리 #아포칼립스 - 연상되는 키워드들만으로도 호기심이 가기에 충분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컨텐츠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진지는 오래고, 호불호가 꽤나 갈린다는 다른 이들의 감상평은 오히려 1화 감상을 망설이지 않게 만들었다. '호'라면 더없이 좋을 테고, '불호'라면 시청을 멈추면 될 테니까. 영화관에 가지 못하는 시대의 미디어 콘텐츠 소비란 이렇듯 속전속결이 된 것이다. 이윽고 며칠 만에 이 특이한(?) 드라마의 시즌1 10개 에피소드의 정주행을 마치고 어제는 시즌2 3편으로 새벽을 지새우고 말았다.




히어로물 같은 게 아냐. 엄청 독특해.
진짜... 특이해.


1599177227584.jpg


친구에게 <엄브렐러 아카데미>를 추천하며 해 줄 수 있던 말은 이게 거의 전부였다. 물론 2019년 방영 이후 넷플릭스 인기작 중의 하나로 자리 잡아 부연 설명이 필요치 않기도 했지만, 달리 할 말이 진짜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서 이런 비슷한 류(?)의 작품 중 이토록 특이한 드라마는 없었다.


나와 비슷한 경우라면 아마 종말, 히어로와 같은 키워드에서 미드 <히어로즈>나 영화 <엑스맨> 시리즈를 떠올렸을 수도 있겠다. 혹은 아주 심플하게는 <어벤져스>와 같은 히어로물을, 다크하게 간다면 영화 <씬시티>라든가 <왓치맨>을 생각했을 지도. 하지만 <엄브렐러 아카데미>는 뭐랄까, 다크하면서도 유쾌하다. 무엇보다 중간중간 삽입된 BGM이 흥겹고, B급 감성도 곳곳에서 묻어난다. 그렇다고 해서 <킹스맨> 같다고 하기에는 굉장히 또 아메리칸 스타일로서 다르고... 아무튼 되게 독특한 건 확실하다.




시즌1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한날한시에 각지에서 태어나 초능력을 가진 아이 7명을 레지널드 하그리브스라는 인물이 모두 입양해 키운다. 그는 아이들의 능력을 계발하고 통제하며 '엄브렐러 아카데미'를 설립하는데, 이 과정은 주로 주연들의 회상을 통해 펼쳐진다. 성인이 된 아이들이 다시 모여 '세상의 종말' 앞에 겪어 나가는 일들에 극의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의기투합해서 일정한 목표 하에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그러기엔 캐릭터 각각의 결핍과 사연이 복잡 다양해서 한 자리에 다 같이 모이기조차 힘들다.


스크린샷 2020-12-31 오전 2.10.21.png


배우 엘런 페이지(최근 성전환 이후 엘리엇 페이지로 개명)의 이미지야말로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주요 원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엄브렐러 아카데미>는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만큼 주연 캐릭터들이 입체적이며 개성이 뛰어나다는 장점을 지녔으나, 어쨌든 시즌1은 엘런 페이지가 열연한 '바냐'의 스토리가 메인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어딘지 침울하며, 피곤한 듯한 그녀의 모습으로 인해 다른 캐릭터들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몰입이 힘겨웠으리라 생각한다. 굳이 침울해하면서까지 드라마를 끝까지 붙드는 스타일은 아니기에, 서사가 쳐진다 싶었을 땐 솔직히 나 역시 불호를 호소하는 이들처럼 고구마 삼키는 기분을 느꼈다.




스크린샷 2020-12-31 오전 2.12.11.png


하지만 완전무결한 드라마가 어디 있으랴. 내용이 답답하기만 했다면 정주행이 이어졌을 리 없다. 다크한 설정과 불완전한 히어로라는 특성이야말로 <엄브렐러 아카데미>가 차별화되는 지점일 것이다. 작품 전체를 통틀어 단연 돋보이는 캐릭터이자 스토리를 강력하게 이끄는 인물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이 작품은 특별하다. 아카데미의 남매들 가운데 유일하게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리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가장 강력한 능력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인물. 겉모습은 어린 시절 그대로 머물러 있으나 실은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이라 쿨내 진동하는 아주 특이한 그의 이름은 '넘버 5'다.


02.jpg


이밖에도 구성원의 면면을 보자면 이렇다. 망자와 교감하지만 딱히 특별한 능력은 없는, 심신이 미약해 늘 약에 찌들어 있는 괴짜 클라우스, 덩치는 어마어마한데 하는 짓은 답답한 루서, 매혹적인 최면술을 지녔으나 좀처럼 능력을 쓰지 않는 앨리슨, 칼을 귀신처럼 잘 다루는데 어딘지 신뢰하기는 힘든 디에고. 다들 독특한 인물들인데 에피소드 10개 안에서 얽히고설키려니 시즌1이 완전무결하기 힘들었던 게 어찌 보면 당연하다. 심지어 '헤이즐'과 '차차'라는 빌런들조차도 묘한 매력을 지닌 캐릭터로 스토리의 상당 부분을 이끌어 가는데, 이러한 다채로움이야말로 <엄브렐러 아카데미>가 높은 인기를 끌 수 있던 원동력이 분명하다.


120042bf59e733d4e01168dcae7fa9a0.jpg


이 작품은 히어로물, 액션, 혹은 판타지 등의 장르로 규정할 수도 없고, 권선징악이라든지 가족애, 사랑과 같은 메시지로도 압축할 수 없는- 말하자면 어디로 튈 지 모르는게 그냥 재밌는 럭비공 같은 미드다. 초월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이상한 캐릭터들의 케미와 징징거림이 조금이라도 기대되는 이에게는, <엄브렐러 아카데미>는 놓치기 아까운 넷플릭스 명작이 분명할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사랑의 끝과,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