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단 이틀 제주 스쿠터 여행 #4

먹보와 털보와 진보 - 2/2

by 차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사진을 정리하며 돌아보는 여행.


당시의 기분에 취해 너무 들떠있지 않고, 오랜 시간이 흘러 기억이 왜곡되지도 않은 선에서 이렇게 가볍게 끄적이는 여행기야말로 좋아하는 기록의 방식이다.


달력을 확인하니 어느덧 5월도 성큼, 주위에서는 너도 나도 제주 여행을 할 거란 분위기. 시기도 시기이지만 코로나 감소세가 뚜렷해지며 나타나는 당연한 현상처럼 보인다. 그래서 붐비기 전 미리 체험하고 온 제주에서의 봄 기억은 내게 더 소중하다.




출처 : wishbeen 여행 지도/일정표


굳이 제주시까지 왔다갔다 한 이유는 바이크를 반납해야만 하던 일정 때문이다. 토요일 오전에 샵이 문을 열기 전 일찌감치 비행기(7시 15분)를 타야 했으므로 금요일 가장 늦은 시각 반납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지도를 놓고 보니 덕분에 제주의 오른편 반절을 하루 만에 일주한 셈이다.



진보가 미리 잡아 둔 숙소에 3시 무렵 체크인 완료. 이틀간 좁은 방에서 혼자 지내다가 아늑한 독채를 맞이하니 더욱 쾌적하게 느껴졌다. 오전 내 강한 맞바람을 쐬느라 피곤했던 우리는 짐을 풀다 늘어지는 몸을 추스르고 카페라도 가자며 밖으로 다시 나섰다. 내가 추천한 카페 '머문'으로 직행. 통창을 통한 오션뷰가 시원하여 월정리에 들를 때마다 종종 찾는 곳이다.



커피 한 잔씩을 때리고 노곤한 몸을 녹였다. 화장실 볼 일을 보고 돌아와 보니 털보, 진보 둘 다 곯아떨어져 있었다. 참으로 속 편한 녀석들이다.


배*의 *족 주문~ 주문~

카페에서 급속 충전을 한 우리는 제주 시내로 향했다. 꽤 긴 거리였기에 어디 들르지 않고 바이크를 계속 탔다. 가는 내내 저녁은 뭐 먹을까 궁리하다가 일단 해장국을 테이크 아웃해서 가기로 했다. 난 처음 들었는데 꽤 유명한 '우진 해장국'이라는 맛집을 두 녀석이 강력히 추천했다. 고사리 해장국인데, 먹어보니 진짜 맛있고 특별했다. 포장한 해장국을 자기 바이크에 싣던 털보는 완벽한 배달 라이더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광치기 해변에서 발이 웅덩이에 빠져 운동화가 젖은 털보는 이후로 계속 슬리퍼를 신었다. 맞바람이 차가웠을 텐데 발가죽이 유난히도 두터운 것 같다. 이럴 때 보면 참으로 둔감한 녀석인데, 그 둔간함이 종종 요긴하게 쓰이는 걸 보면 타고난 재능도 유별난 놈이다.


1 bike, 2 heads


바이크를 반납한 나는 진보의 바이크에 탑승했다. 그에게는 마침 여분의 헬멧이 하나 더 있었다. 시트의 너비로 봤을 땐 털보의 바이크가 적합했으나, 체형을 고려하여 진보를 택했다. 그럼에도 성인 남자 둘이 타려면 밀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타는 내내 허벅지를 바짝 오므려 간격을 두느라 혼났다. 평소에 헬스장에서 내전근(허벅지 안쪽 근육) 단련을 해 둔 덕을 톡톡히 봤다. 안 그랬으면 도저히 불쾌해서 따로 택시라도 탔을 거다. 진심이다. 내가 노력(?)하지 않았다면 진보도 안 태워줬을 거고.

* 2인 1 바이크를 고민하는 성인 남자 여행객 두 분이 있다면 결단코 비추합니다. 어떠한 사정이 있든 꼭 2대 빌려서 각각 타세요. 잠시라도 같이 탈 생각은 마세요.



월정리로 돌아가는 길에 김녕에 위치한 유명한 횟집에 들렀다. 착석이 보장되지 않은 전화 예약을 해 둔 상태였고, 매장이 작았기 때문에 테이크 아웃을 택했다. 회도 술도 밖에서 먹는 편이 낫긴 했겠으나 음주 라이딩을 할 순 없는 노릇이라 숙소에서 저녁만 먹고 다시 나오기로 한 거다.



대표 메뉴인 돔베 사시미 大자를 시켰던 걸로 기억한다. 이견의 여지가 없는 싱싱함을 지닌 회와 딱새우였다.



월정리에서 제주시를 왕복하니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 셋 다 술을 좋아하는 우리에겐 진정한 시간(?)이 다가온 셈이라 아쉬울 건 없었다. 김녕에서 월정리로 가던 길에 잠시 멈춰 저러고 놀면서 관광을 마쳤다.



밤 8시 무렵 숙소에 술상 세팅 완료.



진보, 털보 둘 다 술을 무지하게 좋아하는 녀석들이다. 나도 꽤 좋아하지만 둘에게는 못 미친다. 실제로 진보는 주류 회사에서 근무했었고, 털보는 배에 술통을 달고 다닌다(비유다). 이날 우리의 화제는 좀 쓸데없는 이야기로 깊어진 걸로 기억하는데, 어차피 둘 다 제대로 기억 못 할 거라 나도 그냥 잊고 마는 걸로. 셋 중엔 내가 비교적 술을 덜 먹으며, 기억을 명확히 한다.


Hey guys~


술기운이 오르자 털보의 베프이자 우리 모두와 친한 Anthony와 영상 통화를 했다. 녀석은 지금 상하이에서 영어 강사를 하고 있는데, 익히 알려진 대로 상하이의 상황이 워낙 좋지 못하므로 위로가 필요했다. 그는 마침 마지막 남은 한국 소주 1병을 여자 친구와 함께 격리 중인 집에서 마시고 있었다. 최근에도 위챗으로 그와 연락했는데, 요새 컨디션은 좀 어떠려나 모르겠다. 부디 상하이의 상황이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숙소에서 적당히 먹다가 10시 무렵 해변으로 나섰다. 괜찮은 술집이 있으면 들어가려고(당시 영업 제한 시각은 11시라 1시간이 소중했다). 신기하게도 창가를 통해 디제잉을 하는 분이 있는 바(낮엔 카페)가 보여서 바로 들어갔다. 술집 가는 건 주로 털보가 잘 찾고 주도한다. 참새-방앗간, 꿀벌-벌집 코스처럼 늘 귀신같다.



분위기도 좋고 음악도 좋았다.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칵테일 두 잔씩을 마시니까 한 시간이 금방 흘렀다. 월정리에서 밤에 갈 데는 별로 없어 보였다. 어차피 문을 연 데도 없을 터라 우리는 숙소에 돌아가서 술을 더 마시고 잤다.




이틀간 240km 제주 바이크 일주


다음날 새벽 콜택시를 타고 제주공항으로 가서 이른 비행기를 놓치지 않고 타는 것으로 짧았던 나의 제주 바이크 여행은 끝났다. 급히 결정하고 다녀온 것치고는 거의 완벽한 여행이었다. 일주 코스도 꽤 훌륭했다. 조만간 제주에 다시 간다면 모든 일정까지는 아니어도 반드시 바이크를 빌려 며칠은 다닐 것 같다. 실제로 해보고 나니까 주위에도 확실히 추천할 수 있게 됐다.


서울의 벚꽃이 저문 지 오래지만 올해 따라 하나도 아쉽지 않은 건 제주 어느 도로에서 흩날리는 벚꽃을 맞으며 바다다당 달렸던 덕인 것 같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단 이틀 제주 스쿠터 여행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