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단 이틀 제주 스쿠터 여행 #3

먹보와 털보와 진보 - 1/2

by 차돌


따로 또 같이,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


나이 들수록 편하게 여겨지는 관계의 형태다. 가족이든 친구든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도 탈이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테니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대강 이해할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42F7CC77-2982-40A4-8014-0A9B51A7D3C1_1_102_o.jpeg


서두부터 거창했나? 온전히 여행한 이틀 중 하루를 꼬박 함께한 두 친구를 떠올리며 든 생각이다. 내 벗들 중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누구보다 개성이 강한 개인주의자 녀석들은 바로 털보와 진보. 털보는 수염 길러서 그렇고, 진보는 이름이 그냥 진보다. 넷플릭스 '먹보와 털보'에서 영감을 얻어 내가 명명한 우리들의 하루 여행 부제는 그래서 '먹보와 털보와 진보'(억지로 끼워 넣은 감이 있긴 하지만).


KakaoTalk_Photo_2022-04-22-16-26-28.jpeg


진보 녀석이 제공한 하루간의 이동 데이터다. 오전부터 내내 함께 다녔으므로 내 동선과 일치한다. 확실히 이렇게 표시된 경로를 보니 많이 다닌 게 와닿는다.




0FB0B6CC-67C4-4E38-9830-DD1A67D2A8DB_1_102_o.jpeg 얜 가끔 보면 눈매가 좀 ㄸㄲ다


전날 서귀포에 따로 머물러 있던 진보가 오전 8시 반 경 내 숙소로 찾아왔다. 이번 여행은 사실 진보가 제주에 가기로 한 걸 듣고 털보가 합류, 또 그걸 듣고 내가 합류했다. 각자의 스케줄이 다르므로 가는날 오는날 모두 제각각, 일정 중 딱 하루 토요일만 함께 다니기로 한 거다.


770C99CB-1C15-4382-9AF5-417A39ADB5ED_1_102_o.jpeg


진보와 털보는 작년에도 제주에서 바이크 여행을 했더랬다. 올해도 둘만 쏙 즐기게 두긴 싫어 내가 무리해서 합류하긴 했다. 일요일 일정만 아니었으면 나도 며칠은 더 머물렀을 거다. 아무튼 딱 하루간의 우정 여행이니만큼 우린 아침부터 서둘렀다. 털보는 아침 비행기로 제주로 오는 중이었고, 먼저 만난 우리 둘이 성산-구좌 어디쯤으로 이동하여 바이크 타고 이동해 올 녀석과 합류하기로.


3034274F-CB81-4451-9417-57EB338C4931_1_102_o.jpeg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동쪽으로 달렸다. 바이크도 한 대보단 두 대가 함께 있으니 든든해 보였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함께 달리는 재미도 있었다.


E12976C4-8D97-4B10-8551-1CE97140CCF0_1_102_o.jpeg 가게 문 닫힌 거 확인하기 3초 전


진보가 셋이 만날 장소로 구좌읍에 위치한 풍림다방을 제안했다.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카페였다. 5년 전 제주 한 달 여행을 하며 다녔던 유명한 카페들 중에서도 기억에 남았기 때문이다. 그때와 위치는 약간 달랐다. 송당리 길가에 위치한 작은 점포였는데 인근의 널찍한 마당이 있는 주택형으로 바뀌어 있던 것이다. 짧았던 이번 제주 여행에서나마 수차례 확인한 게 이거다. 제주의 명소들은 5년 주기로 비교했을 때 거의 예외 없이 큰 건물로 확장했단 사실. 중국인이 사라지든, 코로나가 창궐하든, 잘 되는 곳은 역시 잘 된다.




854B9A6D-0410-4D7C-BAB4-BA1ED213AA6B_1_102_o.jpeg 야전삽 짱재 닮은 짭재 털보(실제로 둘은 친분이 있다)


드디어 털보 등장. 그날따라 풍림다방이 문을 닫았길래 다른 곳으로 향하려던 중에 마침 도착한 녀석과 마주쳤다.


79EFD958-E3B4-4C72-B7B8-FF2145250836_1_102_o.jpeg
9632F775-A190-43F9-8A97-3E4637F84BF2_1_102_o.jpeg


조금 걸으니 딱 우리 스타일인 카페 '제주 여기쯤'의 테라스가 눈에 띄었다. 단팥죽 전문점이었는데 정말 맛있고 마당 분위기도 좋아 셋 다 만족했다. 내가 특히 신났던 것 같다. 전날 하루 조용히 혼자 지내다가 셋이 왁자지껄 하니까 업된 것이다. 원래도 셋 중에 내가 제일 말이 많긴 하다.


4A9CC814-1960-424E-9136-4F9AE5DD8A34_1_102_o.jpeg


성산으로 향했다. 가던 길에 이번에도 진보가 제안한 식당 '가시아방국수'에서 점심을 먹었다. 맛집으로 유명한지 대기표를 뽑아야 했다. 털보 진보는 고기국수, 난 비빔국수를 시켰다(이틀 전 고기국밥 먹다가 데인 혀가 여전히 얼얼했다). 돔베고기도 하나 시켜 나눠 먹었다. 역시 여행에서 셋쯤 있으면 식사가 풍성해져서 좋다.




C3C89E3C-C0CD-4C03-BA22-D9679C22C295_1_102_o.jpeg


누가 먼저 가자고 했더라. 나는 아닌데 아무튼 셋이 입을 모아 광치기 해변으로 가자고 했다. '제주도에 왔으니 어디 어디 가자' 이런 건 너무 촌스러운 나이 아닌가. 셋이 합쳐 백 살쯤 되던 무렵부터는 제주 아니라 어디에서 만나든 그래 온 것 같다.


76AC7A10-04CF-47BD-80A3-FFF6DB10E597_1_102_o.jpeg
B3DA3AD1-EFBD-450C-B53D-FE73B3614434.jpeg
971D71D2-7E21-4F95-9EB0-B5E8EB4C6D64.jpeg


낮의 광치기 해변은 성산 일출봉이 내다 보여 더 아름답다. 해수욕을 할 만한 해변도 아니고, 조개구이 맛집이 즐비한 관광지도 아니지만 이름난 명소인 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 셋은 해변을 그저 걷다가, 현무암 지형에 우와우와 하다가, 특이한 돌과 조개를 주으며 '야 이거 봐'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땐 그냥 그랬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그게 좋았다. 나머지 두 놈도 그랬는지는 다음번 술자리에서 물어봐야겠다.




54B45458-7D82-4BFF-BC2D-1D947A5599BF_1_102_o.jpeg
AD7AA2E4-797E-4E4B-8CC6-82049C4DAEDB.jpeg
아직은 청년인 중년들


다시 바이크를 타고 해안을 따라 이동하다가 잠시 멈추었다. 이따금 펼쳐지는 유채꽃밭이 예뻐서 사진 한 장 찍기 위해서였다. 산악회 아저씨들이 왜 꽃을 좋아하며, '여기선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왁자지껄한지 대강 알 것 같다.


035D122B-8243-4683-BE1E-C8E7FCA66FC2_1_102_o.jpeg 오른쪽 털보 헬멧 아니고 머리임


이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반나절, 현재 위치는 제주 동북부 해안, 예정된 숙소는 월정리. 3시 체크인을 1차 목표로 하여 우리는 제주 해안을 따라 계속 달리기로 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단 이틀 제주 스쿠터 여행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