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함께 쓰는 우산과 따로 쓰는 우산은 완전히 달랐다.
비 내리던 오후, 그녀는 그렇게 멀어져 갔다. 도로에 번진 물살을 훑는 자동차 바퀴소리가 귓가에 퍼졌고, 저 멀리 우산을 쓴 그녀가 흐린 챠콜색으로 번져 없어지고 있었다.
한 달 만에 만난 그녀는 대학교 부근에 자취방을 새로 얻었다고 했다. 인근 카페에서 만나 오랜만에 함께 커피를 마시고 나온 뒤였다. 보슬보슬 내리는 빗방울이 우산을 쓰지 않고는 온전할 수 없을 만큼 옷깃을 적셨고, 여대 앞 골목답게 핑크색, 하늘색 우산들이 자못 경쾌하게 거리에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기운을 좀 내려고 시켰던 달달한 카페모카는 그날따라 쌉쌀하기만 했고, 흐린 날씨 또한 침울한 기분을 더욱 가라앉혔다. '헤어진 뒤 처음 만났는데 하필 비라니...' 어두운 얼굴로 카페 문을 나서며 J는 준비해 온 장우산을 펼쳐 썼다.
평소 같았으면, 불과 한 달 전이었더라면 아마도 그녀는 J가 펼친 우산 속으로 들어와 둘은 함께 우산을 썼으리라.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이미 그녀는 가방에서 삼단 우산을 꺼내 펼쳐 든 참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J의 머릿속에는 지난 추억이 스쳤다.
"오빠, 난 이제 앞으로 우산은 혼자 안 쓰고 다닐 거야"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니 그렇잖아~ 따로 가지고 다녀봐야 짐인데, 이렇게 맨날 오빠랑 우산을 같이 쓰니까"
"하하, 그런가. 그래도 날이 흐리다 싶으면 가방에 삼단 우산 정도는 챙기구 다녀~ 나랑 같이 안 있으면 어떡해"
"에이 무거워 무거워, 비 오는 날에 맨날맨날 같이 있으면 되지 뭐~"
같이 있음에도, 그때는 하나의 우산이었고 지금은 두 개다. 이 차이는 매우 크다. 개수나 크기의 문제가 아니다. 함께 쓰는 우산과 따로 쓰는 우산은 소낙비냐 장맛비냐의 성질만큼이나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런 생각에 잠시 멈춰있자 뒤따라 나온 여대생 두 명이 우산을 쭉 펼치기 위해 서 있었다. 자리를 비켜주며 J는 자신의 '전' 여자 친구의 우산 꼭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언젠가 봤던 우산일 수도 있겠지만, 이처럼 따로 떨어져 걸으면서 그녀가 쓴 우산의 비스듬한 뒷면을 보는 건 완전히 처음 겪는 일이었다.
멈칫, 잠시 동안의 주저함이 느껴졌다. J는 그녀의 걸음에서 일순간 리듬의 공백을 느꼈다. 아마 그녀 또한 이렇게 나를 뒤에 둔 채 우산을 따로 쓰고 가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서이리라. 마치 잘 재생되던 음악에 버퍼링이 걸린 듯했다. 길지는 않은, 97% 정도. 그녀의 발걸음은 이내 100%로 돌아와 J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앞서갔다.
"잘... 지냈지? 너무 뻔한 질문이려나, 하하"
"..."
"뭐 마실래? 여기 예전에 한 번 왔던가? 잘 아는데야? 평소에 마시던 거라도..."
"그냥 따뜻한 라떼 마실게"
"아 그래, 내가 가서 주문하고 올게. 난 오랜만에 모카나 마셔야겠다. 단 게 좀 당기네?"
J는 이미 그녀에게서 낯섦을 느끼고 있었다. 어렵게 연락했고, 그 이상으로 어렵게 답변을 받아내어 만나는 자리였다. 한 달의 공백은 둘 사이에 적잖은 거리를 만들어 놓은 듯했다. 밉고 미웠던 지난 고통의 시간을 건너, 오늘만큼은 그녀의 기분을 좋게 만들고 싶었다.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을 위해서는 어떻게든 그녀와의 거리를 최대한 다시 당겨놓아야 한다, J는 그렇게 되뇌면서 떨리는 마음으로 카페로 들어섰던 것이다.
"자 여기 라떼. 쿠키도 하나 사 왔어"
"..."
각오는 했지만, 도무지 어떻게 대화를 풀어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살다 보면 각오가 전혀 소용없는 일에도 부닥칠 때가 있고, 지금이야말로 그러한 순간이었다. 고소공포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을 따라 억지로 번지점프대에 올랐던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만큼 다리가 떨리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기분만은 다르지 않다- J는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을 앞에 두고 대화를 이어가려고 노력했다. 날씨와 학교생활 이야기, 최근에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달군 모 연예인 (그녀가 자주 언급했던 인기스타였다)에 대한 가십까지, 자연스럽지는 않더라도 소통을 위해 J는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때마다 그녀에게서 나오는 대답은 결코 길지 않았다. '내용'은 있으나 '진의'가 없는 건조한 말들이었다. J는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말다툼을 할 때는 그래도 설득하고 이해시키려고 때로는 흥분하며, 때로는 억울해하며 열정을 다하던 그녀였다. 그런데 지금 눈 앞의 그녀에게서는, 어떠한 노력이나 기대의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 말할게. 우리 다시 시작하자. 아무리 생각해도 우린 이렇게 끝낼 수 없어"
"..."
결국 예상보다 일찍 본론을 끄집어낸 J였다. 이게 바로 그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걸 어렴풋이 알면서도 J는 멈출 수 없었다. 어찌 됐든 한 달 만에 다시 만난 그녀였다. 이별을 통보한 것도, 연락을 끊은 것도 모두 그녀가 한 일이었다면, 다시 시작하잔 말은 어떻게든 자신이 강력한 의지와 열정으로 쏟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빠... 내가 오늘 나온 건, 이런 말을 들으려고 한 건 아니야.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나는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어."
"..."
이번에는 J가 침묵했다. 어느새 입술이 바짝 말라있었다.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녀가 이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다만 그가 생각하기로도 자기의 모습은 초라하고 불쌍해 보일 것 같았다. 이건 마치 동정을 바라는 모습이 아닌가- 는 생각에 이르자 삼키면 삼킬수록 카페모카가 쓰게 느껴졌다.
"어쨌든 나도 미안해. 다시 말하지만, 난 다시 시작할 생각이 없어. 오늘 이렇게 만난 건 그래도 오빠가 계속해서 나를 만나고 얘기하겠다 해서야. 더는 무시할 수 없었어"
"..."
자신이 말한 '다시'와 그녀가 거듭 말하는 '다시'가 이토록 다른 표현이라는 데서 J는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 여기까지다, 한 번에 극적인 재결합을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그녀와의 관계가 더는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있지 않다는 확신이 들었다. 지난 한 달이 너무도 길었기에,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이 시간은 차라리 명쾌했다. '만약에 다시 만나자는 얘기만큼은 꺼내지 않았더라면-' J는 창 밖을 바라봤다. 수많은 가정들이 그 어떠한 대답도 얻지 못하고 자신을 괴롭혀 온 지난 시간이었다. 그도 이제는 알고 있다. 더 이상의 가정은 저 빗줄기의 수를 헤아리는 만큼이나 무의미하다는 걸.
나란히 걷기도, 일렬로 걷기도 애매했다. 그리 좁은 인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장우산 하나와 삼단 우산 하나를 나란히 펼쳐 쓰고 걷기에는 불편했다. 결국 J는 비스듬히 그녀의 대각선 뒤로 걸었다. 어쩌면 그녀는 일기예보를 보고 비가 오는 날을 골라서 만나자고 한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각자 우산을 쓰고 있어서 적당히 거리를 둬야만 걸을 수 있는 상황이 J에게는 더욱 비정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지하철 역 부근이었다. 딱히 그녀에게 이끌려 왔다는 의식은 없었지만, 갑자기 그녀가 돌아서서 내뱉은 말을 듣고 보니 J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 아냐 그래도 집 근처까지는 바래다줄게"
"..."
'아, 대체 나는 끝까지 왜 이러고 있는 것인가-' 자신이 방금 뱉은 말을 J는 후회했다. 바래다주겠다는 말에 잠시 또 침묵으로 응답하고 있는 그녀 앞에 우산을 타고 굵은 빗방울이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됐어, 난 그냥 여기서 갈게"
"정말 이렇게 가는 거야? 바로 근처에 산다면서..."
후회해도 곧바로 고쳐지지 않는 것, 그게 바로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하면서도 J는 또 후회스러운 말을 뱉어냈다. 비가 계속 내렸고, 역 앞에서 어정쩡하게 이별한 채 지하로 빨려 들어가기는 어쩐지 부자연스러운 기분이었다. 게다가 우산 때문에, 빌어먹을 우산을 쓰고 있어서 그녀의 눈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이 근처긴 해. 그래도 여기까지가 좋겠어. 잘 가 오빠"
"..."
"..."
"그래, 잘 들어가"
그녀는 역시 단호했다. 카페 앞에서 각자 우산을 펼쳐 썼던 때 이상의 결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J는 무력했다. 몇 계단을 내려가다가, 고개를 돌려 그녀가 간 방향을 응시했다. 삐죽한 우산들 사이로 그녀의 발이 보였다가, 치마가 보였다가, 다시 우산에 가려지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아까 자신의 앞에 있을 때보다 우산을 높이 받쳐 쓰고 가는 것처럼 보였다. 언뜻 허리께까지 내려오는 까만 생머리가 보일 때 J는 그렇게 느꼈다. 자신이 몇 계단 아래에서 올려다봐서인지, 정말로 아까는 그녀가 우산으로 더 숨어 들려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쓰지 않은 우산의 기울기를 가늠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우뚝 서 있는 그의 곁으로 많은 커플들이 우산을 펼쳐 쓰면서 지나갔다. 빗줄기가 전보다 굵어졌지만, 막 지하철에서 내린 그들에게는 그저 오늘의 첫 빗방울 이리라. 팔짱을 끼거나 어깨동무를 한 채 하나의 우산으로 저마다의 반원을 그린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J는 물끄러미 자신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혼자 쓰기에는 지나치게 큰 우산이었다. '당분간은 삼단 우산을 써도 충분하겠다-' 나머지 손으로 우산을 접으면서 J는 생각했다. 자신의 마음도 언젠가는 이렇게 간단히 접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