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취해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 영화 <어나더 라운드(DRUNK)> 리뷰

by 차돌

* 반전 있는 영화라곤 볼 수 없겠으나, 한 편의 제대로 된 음미를 위해 후반 줄거리는 생략한 리뷰입니다.




적당한 취기로 기분 좋을 때가 있다. 감정은 솔직해지고, 행동은 과감해지고, 두려움은 사라진다. 평소에 억눌렀던 마음을 활짝 개방하여 즐기기에 술만 한 것도 없다.


다만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기분 좋은 김에 홀짝홀짝 더 마신 술로 과음하면 누구나 통제력을 상실한다. 몸에서 술을 안 받는 사람은 숙취에 시달리고, 잘 받는 사람이라 해도 만취하면 이성을 잃어 폭주하기 쉽다. 술이야말로 과유불급이란 말에 딱 맞는 물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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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중 알코올 농도 0.05%
약간만 취하면 인생은 축제다


영화 <어나더 라운드>의 포스터 문구다. 꽤나 흥미로운 소재와 주제 의식이 눈길을 끈다. 2021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했고, 매력적인 배우 매즈 미켈슨(맞다. 한식당에서 삼겹살 구워 먹는 걸 즐긴다고 최근 우리 언론에서 이슈가 된 그분)이 주연이라서 믿고 볼 만하다. 마침 넷플릭스에 지난달 신작으로 올라온 걸 며칠 전에야 감상하고 여운이 감돈 상태에서 리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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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은 덴마크의 한 고등학교. 제멋대로인 학생들 앞에서 교단에 선 마르틴(매즈 미켈슨 역)은 영혼 없는 강의를 펼친다.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서도 조용하기는 마찬가지. 별다른 사연 소개 없이도 그가 삶의 활력을 잃은 교사이자 가장이란 사실은 쉽게 파악이 된다.


동료 교사 넷과의 술자리에서 변화는 찾아온다. 마르틴을 위로하던 니콜라이가 제시한 노르웨이의 심리학자 스코르데루의 가설 덕분. 평상시 인간의 알코올 수치는 0.05% 정도 부족하므로 이를 채우면 보다 여유롭고 활기찬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란 이야기다(찾아보니 이는 영화를 위해 실제 학자에게 양해를 구해 내세운 가짜 가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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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가져왔다며 술을 거절하던 마르틴이 작심하고 술을 마시면서 영화의 서사는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수업 전에 스미노프 보드카를 벌컥벌컥 마시고 교실에 들어선 마르틴의 강의는 열정적이고 재밌어서 학생들의 환호를 받는다. 가족들과의 휴가 역시 과거에 아내와 종종 즐기던 카누 여행으로 주도하며 남편 노릇을 톡톡히 한다. 가설 그대로 삶의 활력이 충만해진 것이다.


마르틴을 중심으로 니콜라이, 페테르, 톰뮈 세 친구들 역시 저마다 알코올의 효능을 누린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 높은 혈중 알코올 농도를 실험한다. 하루는 아예 날을 잡고 진탕 마시는 통에 동네에서 작은 사고를 치고 다니며 철없는 아재들의 모습을 보일 정도(이때 등장하는 칵테일 사제락(Sazerac)은 브랜디, 압생트, 페이쇼드 비터, 설탕의 제조까지 비교적 상세히 묘사되는데 꼭 한 번 마셔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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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렇지. 점차 통제력을 잃고 술에 잠식당하는 넷의 이야기로 영화는 후반을 향해 달려간다. 혹시나 영화 <행오버> 덴마크 편을 생각한 분이라면 진작에 실망했을 거고, 그렇진 않더라도 유쾌한 코미디를 기대했다면 아쉬울 수 있겠다. 하지만 영화 <어나더 라운드>는 삶의 소중한 것들에 대해 잠시 돌아보길 원하는 이라면 누구나 음미하기 좋은 영화임에 틀림없다.


정리하자면 이 영화는 그윽한 독주와 같은 수작이다. 매즈 미켈슨의 깊은 눈빛과 정갈한 머리칼(?)에서는 역시란 말이 절로 나온다. 연기력이야 두말할 것도 없다. 흥행 영화처럼 '막 재밌다'라고 소개하기 약간 애매한 건 사실이지만, 내 생각에 이 정도의 작품은 가끔 봐줘야 한다. 대중, 상업 영화의 자극에 지쳤으나 독립 영화의 깊이까지는 부담스러운 분들에게 딱 맞는 쉼표 같은 영화랄까.




영화를 보는 동안 친구들이 종종 떠올랐다. 어느덧 빼박 아재가 된 녀석들 중에는 술의 힘으로 일상의 고단함을 달래는 알코홀릭들이 꽤 있다. 나이가 들며 가끔 만나다 보니 그러려니 했는데, 만날 때마다 취하려고 작정하는 모습을 볼 때면 20대 시절과는 다른 삶의 애환을 느낄 때가 많다.


술을 좋아하지만 그리 자주 마신다고는 볼 수 없는 나. <어나더 라운드>를 볼 때만큼은 혼자서도 와인을 홀짝였다. 그래도 경험상 와인을 두세 잔 마셨을 때 가장 기분이 좋았던 것 같아서다. 결국 위스키도 당겼지만 운동한 게 아까워 참은 걸 보면 아직은 덜 고단한 삶인가 싶다만 이런 생각은 들었다.

'일상에서도 와인 몇 잔 마신 정도의 취기를 유지하면 꽤 재밌긴 할 텐데'


역시 영화가 단일한 해답을 제시하는 건 아니다. 더욱이 좋은 영화란 보는 사람마다의 생각과 상황에 맞는 다양한 감상을 제공할 테다. 나는 작품 서두에 등장하는 키에르케고르의 명언에 비추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의의(?)를 곱씹으며 마무리하고 싶다. 마르틴이 아내와의 관계 회복에 노력하는 내용이 극 중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야말로 술과 사랑이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게 가설 아닌 명제이기 때문이리라.


젊음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꿈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꿈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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