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유머와 감수성
청년들은 잘 웃는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큰 소리로 자지러지게 웃는다. 웃는 표정을 짓는 것은 청년들에게는 숨을 내쉬는 것만큼 손쉬운 일이다. 언제쯤부터 그런 습성이 붙기 시작했을까. 웃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 웃을 수 있는 대상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마라. 아아, 이것이야말로 탐욕스러운 미식주의의 허무한 편린이 아닐까. 하지만 슬프게도 그들은 마음속으로부터 웃지는 못한다. 자지러지게 웃으면서도 자신의 모습에 신경을 쓴다. 또 그들은 남들을 자주 웃긴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남들을 웃긴다. 그 웃음은 전부 허무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그 한 겹 바로 밑에 담긴 심정을 헤아려 줄 수는 없는 것일까. 희생의 영흔. 조금은 될 대로 돼라는 식의, 이렇다 할 목적도 없는 희생의 영혼. 가끔 그들이 지금까지의 도덕률에 비추어 미담이라고 불릴 만한 훌륭한 행동을 하는 것은 전부 그 숨겨진 영혼 때문이다.
<다자이 오사무 내 마음의 문장들 114p.>
비운의 천재 작가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등의 작품과 작가 본인의 비극적인 생애로 인해 그를 우울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주변인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다자이 오사무는 평소에 쾌활하고 유머러스한 편이었다고. 다만 여러 수필집 등을 통해 드러난 그의 회고를 보면, '남들을 웃기기 위해' 스스로 어릿광대임을 자처하며 고독을 느꼈던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보인다.
나 역시 비슷한 감정을 종종 느꼈던 것 같다. 특히 20대 무렵이 그랬다. 10대와는 사뭇 다른 시기였다. 오히려 10대에는 무겁고 진지했고, 20대는 이를 덜어낸 경쾌한 삶을 원했다. 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을 웃기려 했고, 이를 위해 나 자신을 희화화하는 방식을 곧잘 선택했다.
어렴풋이 허무를 느끼면서도 나의 유머는 계속되었다. 모두를 웃기려면 남을 깎아내리기보다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편이 수월했다. 내 꼴이 어떻든 남들이 웃는 모습만 보면 우쭐해져서는 더 떠들어대는 악순환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어느새 마.모.되고 있었다.
30대도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다자이 오사무가 말한 '숨겨진 영혼'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 같다. 그의 말마따나 '자신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남들을 웃기는'건 청년들의 몫일진대, 청년에서도 멀어져 가고 있는 내가 더이상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습관적으로 웃기려다가 우스워지느니 잠자코 침묵하는 게 어느새 더 마음 편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유머가 필요할 때면 나는 되도록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않으면서 재치를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곧잘 웃길 수 있던 패턴(?)에 변화를 주다보니 부작용이 있긴 하다. 재밌다고 생각한 말을 내뱉고는 남들이 웃기 전에 내가 먼저 웃는 경우가 잦아진 것이다. 소위 '아재 개그'란 건 딴 게 아니라 자기 방어와 무심함에서 비롯한 드립 욕심이 아닐까 한다.
멍청이는 말이죠, 시시덕거리는 건 진지하지 않다고 믿어요. 또 우스갯소리는 대답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그러면서 이상하리만치 솔직한 태도를 요구하지요. 하지만 솔직하다는 건 말이에요, 마치 타인에게 신경이란 게 없는 것처럼 구는 겁니다. 타인의 신경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감수성이 너무 강한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기 때문에 쉽게 솔직해지지 못합니다. 솔직하다는 것, 그것은 폭력입니다.
<다자이 오사무 내 마음의 문장들 129p.>
다자이 오사무는 많은 청년들이 웃는 이유를 '허무의 마음'에서 찾아냈다. 그 역시 종종 허무하고 순수했기에 누구보다 그 마음 잘 헤아렸으리라. 자지러지게 웃다가도 이내 쓸쓸해졌으리라.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리라, 자기 감수성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유머 없이 솔직해지기 힘들단 사실을.
돌이켜 보면 나는 오늘도 수차례 시시덕거렸던 것 같다. 그러면서 왠지 모를 허무를 여전히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다행히도 다자이 오사무의 말 덕분에 기대치 않던 힘이 생겼다. 진지함을 몰라보고 솔직을 강요하는 멍청이들의 폭력 앞에 나는 앞으로 더욱 당당히 유머를 던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