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월의 에메랄드와 더럭분교의 파스텔톤 풍경에 흠.뻑.
# 여행 셋째 날, 진짜 제주
# 하귀-애월 해안도로 드라이브
# 애월, 한담해안산책로
# 카페 봄날, 몽상 드 애월
# 더럭분교
날이 정말 맑았다. 제주에 도착한 지 3일 만에 처음으로 서부를 둘러보기로 했다. 제주의 해안 도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하귀-애월 드라이브 코스를 지나 애월을 구경한 뒤 인근의 더럭분교에 들르는 계획을 짰다. 아침에 일어나서 지도를 보며 정했다. 가고 싶은 곳들의 우선순위 목록이 있으니 당일의 동선만 고려하면 하루 일정이야 얼마든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역시 가장 인기가 많은 해안도로다웠다. 이전의 제주여행에서 분명히 한 번 달려봤던 하귀-애월 코스였지만 그때와 지금은 또 달랐다. 중간중간 대여섯 번은 차를 세워놓고 풍경에 감탄했다. 비교적 한적한 시간이라 뒤차를 신경 쓰지 않고 천천히 운전할 수도 있었고, 따사로운 아침 햇살을 홀로 온전히 누릴 시간도 충분했다. 이리저리 풍경 사진을 꽤 찍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 한 장이 있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있는 한 여성의 뒷모습이 주위 풍경과 너무나 잘 어울렸던 모습이다. 스냅샷 한 장 만으로 제주 바다의 풍경과 운치를 잘 담아내기란 쉽지 않은데, 그분 덕분에 두고두고 마음에 드는 사진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여행지에서의 사진은 크게 세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풍경사진, 2) 인물사진, 3) 인물이 있는 풍경사진. 1번은 자연경관 자체에 감탄해 그 모습을 간직하고자 찍는 사진이며, 2번은 주로 '인증샷' 의 용도로 찍거나 찍히는 사진이다. 물론 이때에도 이왕이면 예쁜 배경을 찾아서 촬영하지만, 목적은 어디까지나 '누군가와 내가 함께 이곳에 왔다'는 확인이다. 상단에 첨부하고 언급한 사진은 바로 3번에 해당한다. 풍경만으로는 왠지 심심하고 흔할 것 같은 사진에 사람이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만족스러운 작품이 된다. 지인에게 부탁해 컨셉 사진을 찍거나, 모르는 사람을 몰래 찍는 방법이 있는데 아무래도 후자의 경우가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타인의 모습을 찍어야 하므로 당연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찰나의 포착이 쉽지 않다. 운 좋게 마음에 드는 사진을 얻게 되면 더욱 기쁘고 애착이 가는 이유다.
드라이브를 하며 속도감을 즐기고 싶을 때는 당연히 직선 도로가 좋을 테지만, 천천히 풍경을 즐기고 싶다면 구불구불 해안도로만 한 드라이브 코스도 없을 것이다. 오른편 조수석 창 너머로 바닷가를 두고 달리면서, 해안으로 불쑥 뻗은 길을 따라 우회전을 했다가 다시 좌회전을 하면 내륙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거침없이 바다를 향하다가도 어느새 아늑하게 바다를 품고 있는 제주도의 해안은 충분한 햇살을 받아 더욱 눈부셨다.
노랗고 빨간 리치망고 가게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제주를 여행할 때마다 즐겨 찾는 음료가 바로 생망고 주스인데, 역시 서울에서 마실 때는 그 맛이 나질 않는다. 나만 그런 게 아닌지, 서울에도 망고주스 전문점이 있지만 아직까지 일삼아 그곳을 찾는다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마침 목이 마르던 참에 또 한 번 차를 세워놓고 바다를 바라보며 달고 시원한 주스를 즐겼다. 산 정상에서 파는 육개장 라면을 먹을 때의 특별함을 느꼈다.
망(만)고땡이 아닐 수 없었다. 4일 연속으로 휴일을 가져본 게 오랜만일 뿐더러, 쫓기듯 하는 여행이 아니라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여행을 하다 보니 그토록 세상 느긋했던 것이다. 첫날, 둘째 날에는 산책을 하다가도 여행 오기 전까지의 고민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게 사실이다. 그러다가도 밥때가 되면 식당을 찾아다녔고 식후에는 다음 행선지를 정하고 이동하느라 당면한 여행에 집중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마침내 여행의 셋째 날, 해안도로를 드라이브하면서 제주도의 '진짜' 바다를 마음껏 구경할 때에는 별다른 생각의 전환이나 노력 같은 건 필요치 않았다. 탁 트인 시야만큼이나 마음은 넉넉했고 맑고 푸른 바다만큼 머릿속은 투명했다. 탁한 생각이 끼어들 여지 따위는 없었다.
한담해안산책로 주차장에 도착했다. 적당한 공간에 차를 대고 조금만 걸어 내려가니 바다를 낀 호젓한 보행길이 나왔다. 애월에서 가장 유명한 카페 '봄날' 도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그리로 걸어갔다.
별도의 카메라 없이 아이폰 만으로도 여행사진을 담기에 문제가 없다고 여겼지만, 역시 광활한 바닷가 앞에서는 화각이 턱없이 모자람을 느꼈다. 평소에는 쓰지 않던 '파노라마' 촬영 기능이 제주마 방목지에 이어 다시금 유용하게 쓰였다. 이후로도 탁 트인 풍경이 나올 때면 어김없이 촬영한 파노라마 사진들은 따로 분류해서 보관하고 싶을 만큼 소중하다. 좋은 장비로 촬영한 게 아니다 보니 수평 수직의 왜곡이라든지 광량 조절의 제약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런 '기술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당시의 '심미적'인 감탄이 담겨있는 덕분이다.
투명카약을 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제주의 유명 관광지인 쇠소깍에서 타는 카약이 예약하지 않고는 탈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고 해서 궁금했는데, 애월 바다에도 비슷한 레저 장소가 있을 줄은 몰랐다. 이후로도 해안가에서 몇 번 본 카약 탑승처들 중에서도 나는 애월을 으뜸으로 꼽는다. 단, 그날은 처음으로 보았던 데다 혼자서 탈 생각은 없었기에 알아만 뒀고 2주가량이 지나 동행과 함께 기어코 다시 방문했다.
가이드북이고 인터넷이고 할 것 없이 애월 해변의 봄날 카페는 제주의 대표적인 명소로 꼽힌다. 갈 때마다 손님들로 붐볐는데, 워낙에 터가 좋고 잘 관리되고 있어서 명성에 걸맞은 카페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방문 때는 안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구경만 했다. 산책로를 좀 더 걷고 싶었고, 바로 근처에 있는 '몽상 드 애월' 카페도 구경하려 했기 때문이다.
GD 소유의 카페로 유명한, 생긴 지 오래지 않았으나 카페 봄날과 가깝고 사장이 사장인지라 금세 명소로 등극한 몽상 드 애월 카페는 그러나 그날 제대로 불 수 없었다. 여러 사람들이 산책로에서 카페로 향하는 길을 통제하고 있어서 무슨 일인가 봤더니 광고 촬영 중이라고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말로는 모델이 다름 아닌 공유라고 했다. 당시에 드라마 도깨비가 방영 중이었는지 종영 후였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공유의 주가가 무지막지하게 치솟아 있던 때가 확실하다. 사진 한 장이라도 찍어서 여자 친구에게 바쳐볼까 했으나 워낙에 거리가 멀어서 불가능했다. 원체 머리가 작은 인물이니 웬만큼 가까이가 아니고서는 제대로 보기 힘들었을 거라 위안 삼으며 촬영을 위한 통제에 협조했다. 그러다 최근에야 당시에 찍은 것으로 보이는(몽상 드 애월 카페만의 반사거울 외벽으로 확인) 광고를 언뜻 보았는데, 다름 아닌 인스턴트커피 카* 광고였다.
한담해안산책로를 왕복하고 차로 돌아와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오후였다. 역시 허기에 의해 움직였다. 미리 봐 둔 식당이 멀지 않은 한림 시내에 있었다. 불행히도 휴일이었다. 늘 예정대로 여행할 수 없음은 익히 각오했으므로 "일요일은 놀고, 월요일은 쉽니다"라는 식당의 안내문쯤이야 웃어넘길 수 있었다. 다만 다른 식당은 알아놓지 않아서 새로 맛집을 찾아야 하는 게 문제였는데, 검색해 봐도 딱히 끌리는 식당을 찾을 수 없었다. 시간도 애매했고 더는 지체하기 싫어서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햄버거 하나로 끼니를 때우기로 했다. 마침 맘*터치가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제주에는 해당 프랜차이즈가 유독 많다. 이유는 모르겠고, 기억나는 건 당시에 차에서 먹은 치킨버거가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는 거다. 어설픈 고기국수나 전복요리를 먹느니, 제주에서 맘*터치 햄버거를 먹는 게 낫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더럭분교를 방문했다. 세계적인 '컬러리스트' 장 필립 랑클로가 광고 프로젝트에 참여해 폐교 직전의 학교를 알록달록 예쁘게 꾸며놓아 유명해진 곳이다. 주말이라 학교가 완전히 개방된 상태여서 마음껏 둘러볼 수 있었다. 평일에는 보통의 학교와 다름없이 아이들이 수업을 받는 공간이라 훼손 없는 보호가 중요한 명소다. 마침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있었고 아이들을 위해 준비했는지 색색깔 풍선까지 볼 수 있어서 기대 이상의 풍경을 누렸다.
마음껏 해안도로를 달리고 바다를 구경하고 온 덕분에 기분이 더 좋은 상태로 파스텔색 가득한 교정을 거닐었다. 낡은 시골 분교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특색 있게 여러 색을 입힌 학교 건물이야말로 '예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어린 학생들이 순수한 동심을 간직하며 자라기 좋은 환경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행여 관광객들 때문에 불편함이나 피해가 없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더럭분교는 수돗가마저도 컬러풀했다.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뛰어놀다가 목이 말라서 수도꼭지를 틀면 색색깔 환타 음료가 나올 것만 같은 공간이었다.
비눗방울을 따라 뛰어노는 어린아이들과, 이들을 찍느라 빙 둘러앉은 어른들. 연출이라 해도 좋을 만큼 더럭분교에서 본 풍경은 완벽했다. 미소가 저절로 나왔다.
문득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보니 무채색이 많았다. 생각해 보니 어릴 때는 알록달록 다채로운 색을 좋아했던 것 같다. 크레파스도 색이 많은 게 좋았고, 물감도 팔레트 칸칸마다 최대한 여러 색을 짜 놓고 쓰던 기억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검정을 좋아하고 있다. 심플하고 시크한, 어딘지 '남자다운' 블랙이야말로 최고의 색이라 믿고 휴대폰이며 전자기기도 블랙 계통을 선호한다. 어느새 알록달록한 색들은 '유치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당연히 옷 색상도 무난한 게 좋다. 쓸데없이 튀고 주목받을 필요가 없으니, 차분하고 실용성 높은 색을 찾아 복장과 액세서리를 매치업 하는 것이다.
'색이 바래다'는 표현이 떠오른다. 나이가 든다는 건 곧 다양한 색을 잃어가는 것이라 하면 너무 어두운 얘기일까. 아직은 그런 말을 할 만큼 나이를 먹지도, 색이 바래지도 않은 청춘이라 자부해도 좋은 걸까. 아무튼 확실한 건 그날 제주 더럭분교에서 마음껏 본 파스텔톤 풍경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화사한 기분이 든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더욱 지금 눈 앞에 있는 거뭇거뭇한 물건들과 입고 있는 회색 옷이 대비되어 나이 듦을 떠올렸나 보다. 확실히 여행은 할 때뿐만 아니라 언젠간 돌이켜 볼 과거로서도 끊임없이 생각을 확장해 줘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