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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돌 Sep 20. 2017

제주 한달살기, Day5 : 제주의 바람

성산일출봉과 섭지코지에서 온몸으로 제주를 느끼다

# 여행 다섯째 날, 맑은 날 시원한 바람
# 늘 새로운 성산일출봉과 섭지코지
# 전복 물회와 망고주스




제주를 여행할 때면 성산일출봉을 빼놓지 않고 들른다. 갈 때마다 참 새롭고 좋다. 산과 바다와 바람이 어우러진 이곳이야말로 제주가 왜 제주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명소임에 분명하다. 혼자서 성산일출봉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천천히 걷고 마음껏 서서 푸르른 바닷바람을 들이마셨다.





제주 동부에 툭 튀어나온 지형으로 가는 길에는 성산포 공원이 널찍하게 바다와 맞닿아 있다. 잠시 차를 세우고 멀리 한눈에 들여다 보이는 성산일출봉의 모습을 바라봤다. 날씨가 맑아 더욱 투명한 바다와 하늘 사이로 짙푸르고 평평한 땅이 솟아있고, 그 주위를 구름이 감싸고 있었다. 이곳에서만큼은 분명히 자기가 주인공이라는듯한 당당한 위용이었다.

   


성산일출봉을 오르는 길의 경사는 그다지 완만하다고는 할 수 없다. 시원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땀을 꽤 흘려야 할 정도로 가파른 계단도 있고 햇살도 따갑다. 이를 알고 있기에 충분히 편안한 복장에 수건과 물까지 미리 준비했다. 그래 봐야 야트막한 산 정도의 높이라서 청바지에 구두를 신은 관광객의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지만, 아무래도 편하면 편할수록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더 생기게 마련이다. 조금만 오르자 이내 탁 트인 풍경이 시야에 들어와서 눈이 시원했다. 중간중간 충분히 멈춰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여유롭게 올랐다.



정상에서는 바다를 배경으로 분화구의 넓은 모습이 펼쳐져 있다. 여기저기 사진을 찍는 사람들 사이로 장소를 바꿔가며 성산일출봉 꼭대기에서의 풍경을 마음껏 즐겼다.



입구 정면에서 바라보는 성산일출봉도 물론 멋지지만, 이렇게 내려오는 길에 측면에서 보는 모습 또한 매우 아름답다. 개인적으로 이 구도야말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산일출봉의 얼굴이다. 사람들이 출입하는 정면에서야 반대편이겠지만 성산일출봉의 진짜 콧대는 바다에 맞닿은 저 모습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깎아지른듯한 바위의 모습이 강인해 보이면서도 결코 날카롭지는 않게 주위와 어우러진 풍경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일상을 살아가며 그저 있는 것 그대로에 감탄할 때가 얼마나 있을까. 여행이야말로 새로운 곳의 경관에 놀라며 기존의 답답한 사고와 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임에 분명하다. 잠시 뿐인 환희만으로도 두고두고 가슴에 남을 픙경을 기억할 수 있는 장소인 제주도는 그래서 국내에서는 독보적인 여행지다.




  

땀을 꽤 흘린 후라서 목이 몹시 마르고 배도 고팠다. 성산일출봉 근처에 식당과 상점들이 많이 있긴 했지만 어쩐지 붐비는 곳에 가기 싫은 기분이었다. 시원한 물회를 먹을 참이었다.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장승포 식당'이라는 곳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주메뉴는 전복 물회. 시원하고 새콤한 맛에 오도독 전복의 식감이 어우러져 등산의 피로를 싹 날릴 수 있었다.


식후에는 입안에 매운맛이 감돌았던지라 망고주스 가게를 지나칠 수 없었다. 달콤한 망고주스가 물회의 후식으로 그냥 딱이었다. 어쩜 그리도 간단한 계획만으로 만족스러운 식도락 여행이었는지. 음식 맛은 결국 재료가 좌우한다는 말이 있듯 여행지가 제주도라서 이미 반은 먹고 들어갔기 때문인 걸까.





성산일출봉과 마찬가지로 섭지코지는 제주 여행에서 빠짐없이 들르는 곳이다. 두 명소는 아주 가까이 위치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만이라면 굳이 이곳을 수차례 방문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유한 경관만으로도 제주의 어느 관광지에 못지않게 시원한 느낌을 주는 곳이 바로 섭지코지다. 아니, 비교하는 자체가 실례일지도 모르겠다. 제주의 가장 훌륭한 명소 중의 하나라는 말이 더 올바른 표현일 것 같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곳을 소개하는 많은 안내서들이 드라마 '올인'의 촬영지로 유명하다는 정보를 내세우고 있다는 점은 안타까운 사실이다. 드라마가 유행했던 2000년대라면 모를까, 한류 콘텐츠를 홍보하는 것도 좋지만 여행지 본연의 맛과 멋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이 든다. 섭지코지는 올인, 사려니숲은 시크릿 가든, 또 어디는 무슨 드라마... 천혜의 자연환경을 잘 보존하고 관광산업을 활성화시킨다면 드라마뿐만 아니라 영화도 수없이 찍고 많은 사람들이 알아서 찾을 텐데. 해외 유명 관광지들은 오히려 너무 많은 매체에 등장해서 어느 하나를 내세울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에 반해 세계적으로도 훌륭한 제주의 자연환경을 두고서 드라마 하나를 자랑스레 내세우고 아시아권 관광객 유치에만 열을 올리는 모습은 우리 관광산업의 빈곤한 현실이라는 생각이다.

   


사실 여행할 때는 미디어니 관광산업이니 하는 따위의 생각은 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너무 좋아서 천천히 걸었고, 인적이 드문 곳에서는 마음껏 셀카도 찍으면서 놀았다. 휘날리는 머리칼을 그대로 두어 섭지코지의 바람을 조금이라도 사진에 담아보고자 했다. 혼자 여행하면서 참으로 유용한 셀카봉이었다. 바람이 많이 부는 가운데 꼭 셀카가 아니더라도 지지대 삼아 휴대폰을 고정하고 풍경 사진을 찍기에도 좋았고, 파노라마 사진을 위해 좌우로 이동할 때도 회전축 역할을 해주어 편리했다. 여기에 작은 다리 세 개를 마음껏 구부려서 지형물에 고정시켜 타이머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미니 삼각대도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대형 서점에서 9,900을 주고 다른 물건 몇 개와 함께 샀기 때문에 별도의 비용이 들었다고도 할 수 없다.



해안을 실컷 바라보며 걸어간 끝에 도착한 글라스 하우스는 푸른 하늘 아래 세련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타다오의 작품으로 유명한 이곳은 상업 시설인지라 2층에는 레스토랑이 있고 1층은 전시 공간인데, 예전에 들렀을 때와는 달리 지포 라이터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었다. 다소 생뚱맞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어차피 전시관이 주목적이 아니었으므로 대충 둘러보고 나왔다. 레스토랑은 이번에도 역시 이용하지는 않았다. 그저 외관을 바라보고 주위 정원을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오래 걸으며 바람을 많이 맞아서 그런지 저녁이 오기 전에 피로가 몰려왔다. 성산일출봉과 섭지코지, 이 두 곳을 제대로 감상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하루라고 생각했다. 인근의 새로운 해변 카페를 찾았다. 역시 서부든 동부든 제주 해안에서는 그럴듯한 야외 카페를 찾는 일이 쉬웠다. 약간 흐려진 날씨 때문인지 카페에도 바람이 몹시 불었다. 마치 내가 앞선 여행지들에서 바람을 몰고 온 듯했다. '바람의 여행자라.. 은근히 멋진걸?' 따위의 잡생각을 하다가 밖에서는 도저히 노트북을 할 수 없겠다 싶어 안으로 들어갔다. 주문해 놓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받아든 채 가로로 넓은 원목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비로소 몸에 온기가 퍼졌다.


슬슬 요령이 익어서 그런지 사진을 정리하고 여행기를 쓰는 일에 속도가 붙은 참이었다. 조금이라도 잊기 전에 어제의, 그날의 기억을 기록으로 채워가는 일은 더할나위 없는 여행의 즐거움이었다. 하루의 마무리를 카페에서 조용히 보내는 시간이 어느새 여행중 하나의 패턴으로 익숙해져 감을 느꼈다. 자리에 앉아 새로 여행한 제주에서 느낀 단상을 떠올리고 또 쓰다보면 컵을 꽉 채웠던 커피가 바닥을 드러낼 정도로 시간이 금방 흘러 있었다.


실내에 있으니 언제 불었냐는 듯이 바람이 잠잠한 것 같았다. 창 밖 너머의 파도라든지 사람들의 머리, 옷매무새의 변화만으로 여전히 바람이 불긴 부는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바깥에 서서 온전히 느꼈던 성산일출봉과 섭지코지에서의 바람을 떠올려 봤다. 천지 차이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이처럼 창 밖 너머 구경하듯 바람을 본 적이 많지 않았던가. 바람이 일으키는 변화만 볼 게 아니라 바람 그 자체를 피부로 힘껏 느껴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을텐데.


카페를 나서자 바람은 여전했다. 손에 든 바람막이를 다시 걸치자 마자 파르르 떨리는 소리가 났다. 춥지는 않았다. 커피 한 잔의 온기와 휴식이 적절한 뒤였다. 앞으로는 제주가 아니라 어디서든 창 너머로만 바람을 보고 있지는 않겠다는 다짐을 했던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성산일출봉과 섭지코지의 바람을 내 안으로 조금은 가져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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