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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돌 Sep 27. 2023

말 뒤에 숨지 않기

멋있어지기 #4



말 뒤에 숨지 마.


  그가 내게 추궁하듯 말했다. 나는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내가 숨는 게 아니라 저가 나를 끄집어내고 발가벗기려는 듯 느껴졌지만, 일견 일리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나는 종종 말 뒤에 숨어서 스스로를 방어하려 했다.


느닷없는 지적이 불쾌했다 한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의 진의'마저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었다. 나는 그저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말 뒤에 숨지 않기로. 누구 앞에서든 장황하게 말만 늘어놓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로.





  말이 길어지는 건 보통 자신이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다. 상대가 나를 '오해'하고 있다고 판단할 때 사람들은 말을 덧붙이고 덧붙인다. 심플한 말이나 행동으로 타인을 납득시키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혀가 길수록' 변명이나 핑계를 말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건 진리에 가깝다.


타인의 오해를 두려워하느라 어수선한 말들을 쏟아내지 않기로 했다. 장황한 말보다 간결한 침묵을 택하기로 했다. 행여 오해 받더라도 나만 떳떳하면 상대의 몰이해 탓이란 사실을 깨달아서다. 어차피 이때의 오해란 내가 아닌 상대방의 몫이다. 타인의 몰이해를 거두어 내느라 억울한 사람이 되는 일만큼 억울한 일도 없다.






  그렇게 결심하고 나서부터였다. 말 뒤에 숨는 이들의 비겁함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치인이며 유명인들이 왜 그리 말이 많은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들은 말 뒤에 숨기에 급급한 거였다. 자신을 속이기로 단단히 결심한 사람일수록 현란한 말로 남들까지 속이려 애쓰고 있었다.


말 뒤에 숨는 이는 내 주위에도 많았다. 아주 비겁한 마음까지는 아니어도 습관처럼 말 뒤에 숨는 게 꼭 예전의 나와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전보다 더 듣고, 덜 말했다. 그럴수록 상대는 신이 나서 많은 말을 쏟아내곤 하는 거였다. 숨고자 하는 이들은 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어수선한 말들에 가리어진 진실이란 말하지 않아도 드러나게 마련이었다.





  요컨대 내가 경계하는 것은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할 말을 무기 삼아 숨어버리는 비겁함이다. 이때의 비겁함이란 대게 남 탓을 위해 자신의 허물을 정당화할 때의 비겁함이다. 내게 말 뒤에 숨지 말라고 했던 이도 결국엔 나를 지적하느라 수많은 말을 쏟아내다 자기 말 뒤에 숨어버리는 것을 나는 바로 보았다.


한참 전의 일이다 보니 내가 그에게 너 역시 말 뒤에 숨지 말라며 되받아쳤는지 안 그랬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다짐할 뿐이다. 앞으론 말 뒤에 숨지 말란 말조차 타인에게 함부로 휘두르지 않으리라고 말이다. 숨으려는 이를 추궁하면서까지 얻을 것은 무엇이겠는가. 내가 안 숨으면 될 일이지 남까지 숨지 말라고 강요할 정도로 날을 세우며 살고 싶진 않다.


  끝으로 말 뒤에 숨지 않으리란 결심을 끄적인 말들조차 실은 조금은 숨으려는 마음에서 비롯되지 않았나를 돌아본다. 숨 쉴 틈 정도의 너그러움으로 이해받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부디 어수선한 말과 글이 아니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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