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에 머리를 자른 날 박물관을 구경했다가 카페를 두 군데 갔다.
# 함덕 고운 미용실 - 국립 제주 박물관 - 카페 그러므로 - 카페 아프리카
모처럼 혼자 부스스 잠에서 깨어 생각했다. 오늘은 머리를 잘라야겠다고. 여행을 출발했을 때 눈가를 스치던 머리카락이 스무날이 지나자 약간 불편하다 싶을 정도로 자라 있던 것이다. 특히 제주에서는 바람이 많이 불기 때문에 앞머리가 길어봤자 쓸어 넘기기도 귀찮고 좋을 게 없었다.
숙소 호스트분으로부터 추천받은 함덕 시내의 작은 미용실로 먼저 갔다. 문이 굳게 닫혀있어 전화를 걸어보니, 아주머니가 몸이 편찮으셔서 오늘은 영업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프시다고 하니 내일이라고 오픈할 거라는 보장이 없어 다른 미용실을 찾아봤다. 근처의 미용실 가운데 가장 커 보이는 곳에 갔는데 웬걸, 거기는 하필 또 그날 화요일이 정기휴일이라 역시 문이 닫혀 있었다.
몇 군데 미용실이 더 있기는 했으나 이발소에 가까운 곳이거나 아주머니 몇 분이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작은 가게들 뿐이라 선뜻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뭐 대단찮은 머리나마 그래도 한 번 자르면 붙일 수 없는 머리카락인데 서울에서나 제주에서나 미용실 선택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미용실 한 군데를 발견했다. 골목 안쪽에 위치해 한적한 데다 작은 건물이 어딘지 정겹고 이름도 마음에 드는 미용실이었다. 앞선 손님이 있어 커트를 하려면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한다기에 다시 오겠다 하고 일단 나왔다. 마침 배가 고팠기 때문에 근처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오면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가까운 패스트푸드점에 가서 아침 겸 점심으로 햄버거 세트를 먹었다. 두툼한 닭고기 패티가 먹음직스러운 프랜차이즈 매장이었다. 프렌치 프라이도 굵고 바삭해서 아주 맛있었다. 그러고 보니 제주에서 몇 차례 들렀던 햄버거집들은 모두 수제버거처럼 맛있었다.
한 시간 뒤 다시 미용실로 들어서자 아주머님이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여전히 미용 중인 손님이 있어 조금 더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동안 먹으라며 아이스크림을 건네주셔서 고마웠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자 자리에 앉아 커트보를 둘렀다. "투블럭으로 잘라드릴까요?"라는 질문에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아뇨, 단정하고 깔끔하게 다듬어만 주세요"라고 대답했다. 지금껏 서울의 미용실에서도 그렇게 잘라보지는 않았는데, 제주의 작은 미용실에서 만난 아주머님이 대뜸 투블럭 스타일을 여쭤보실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커트비가 만 원으로 저렴했는데, 그럴 때 한 번 투블럭으로 잘라볼걸 그랬나.
여행 중 이발을 하며 평소와 한 가지 달랐던 점은, 머리가 마음에 들든 아니든 다시 올 일은 없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기대나 실망보다는 그저 '머리를 단정히 한다'는 본연의 목적만 품다 보니 거울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원래 미용실에서 그리 까다로운 편은 아니지만, 새로 방문하는 곳일수록 여긴 더 잘라야겠다거나 구레나룻을 어떻게 해 달라는 등 명확하게 의사표현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를 하곤 했던 경험이다. 따라서 미용실은 서비스를 받는 손님 입장에서도 적당히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 중의 하나라는 생각인데, 제주 여행 중의 이발은 전혀 그런 긴장 없이 내 머리를 만 원에 믿고 맡겨서 편했던 것이다.
머리를 자르며 생각해 놓은 다음 행선지는 박물관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만, 조금씩 가벼워지는 머리를 느끼며 오름이나 바다 같은 곳들은 떠오르지 않았고 천천히 무언가를 '관람'하는 시간을 원했던 기억이다. 전날까지 십여 일을 실컷 웃으며 떠들고 돌아다녔으니 이제는 다시 내 안으로 침잠하고 싶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박물관만큼 좋은 장소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행 초반에 들렀던 세계자연유산센터의 전시물들이 주로 제주의 자연환경에 대한 것이었다면, 국립 제주박물관은 그 대표성에서 알 수 있듯 제주 지역의 전반적인 역사, 문화, 생활상을 다루고 있었다. 모든 전시는 연대기 순으로 이어져 있어 약간 단조로우면서도 편안한 관람이었다.
고지도 하나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그려진 지형이 비교적 정확한 데다 지명 또한 지금과 다르지 않은 곳들이 여러 군데 눈에 띄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재미있던 건 지도의 방향이었다. 지도의 위쪽이 북쪽이 아니라 제주의 남쪽이었다. 이유인즉슨, 한양에 있는 임금이 아래로 내려다보는 기준으로 제작을 하다 보니 지도의 아래가 내륙에서 더 가까운 제주의 '북쪽'일 수밖에 없던 것이다. 자세히 보니 과연 성산과 우도가 섬의 동쪽이 아닌 서쪽에 그려져 있었다.
기준의 차이. 왕조 시대에는 너무나 당연했을 지도의 방향이 현재와 반대인 사실 자체가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시대의 당연함이 180도 바뀐 데 대해 잠시 생각해 봤다. 절대 왕정 체제에서 임금을 기준으로 그린 지도의 위아래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한 방향이었으리라. 이를 현재의 기준으로 보자면 분명히 남북의 방위가 정반대로 표기된 지도인데, 과연 그렇다고 현재의 기준을 절대적인 것으로 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동안 알고 있던 비정상이 언제부턴가 정상으로 둔갑해 있고, 정상인 줄 알았던 것들이 비정상으로 드러나는 어수선한 현실 앞에 차라리 지도의 위아래쯤은 대수롭지 않다고 여겨졌다. 남북뿐 아니라 동서 좌우를 가리지 않고 저마다의 기준만 내세우기 바쁜 현실 정치의 쟁점들을 떠올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단체 관람을 온 학생들의 소란을 피해 전시를 둘러보느라 신경 쓴 것을 제외하고는 무난한 박물관 구경이었다. 솔직히 기억에 남는 전시였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세계자연유산센터처럼 제주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들을 익히기에는 이만한 관람도 없을 터였다. 게다가 무료라서 더욱 부담 없이 쓱 둘러보고 나오기에도 좋은 곳이니, 박물관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국립 제주박물관은 여행 중에 한 번 가볼만하다.
관람 이후에 박물관 뒤편 정원 벤치에 앉아있던 시간이 참 좋았다. 이는 실내에서 차분하게 전시를 둘러보다가 탁 트인 야외로 나갔을 때 느낄 수 있는 보통의 해방감 이상이었다. 인적이 드문 잔디밭을 그저 거닐다가 종종 거리며 뛰어가는 까치도 구경하고, 그러다 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하기도 했던 소박한 시간이었다. 꽤 한참을 그렇게 햇살 아래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다가 커피 한 잔이 생각나서 자리를 옮겼다.
내가 주로 참고한 제주여행 가이드북 <요즘 제주>에 따르면 제주 3대 커피집으로는 '풍림다방, 유동커피, 그러므로' 가 꼽힌다. 앞선 두 군데는 가 봤으니 남은 건 마지막의 '그러므로' 였는데, 마침 국립 제주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차로 10여 분을 가니 앞서 알아본 대로 동네 모임공간 같은 빌라 건물 1층에 카페가 영업 중이었다.
카페 그러므로의 시그니처 메뉴는 가게 이름처럼 독특한 '메리 하하' 다. 따뜻한 에스프레소에 차가운 연유, 우유가 위층을 형성하고 있어 처음 마실 때는 시원한데 들이켜 보면 따스한 커피가 입안 가득 맴돈다. 굳이 비교하자면 스타벅스의 돌체라떼를 따뜻하게 마시는 정도의 맛이겠는데, 한 번 마셔본 기억으로 향과 깊이를 더 가늠하기는 힘들 것 같다. 분명한 건, 마셨던 당시보다도 시간이 지난 지금 꼭 다시 마셔보고 싶은 커피라는 거다.
카페 안에는 아이를 데려온 아주머니 몇 분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일반적으로 카페 고객이라고 볼 만한 손님이 앉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 무슨 모임방 같았다. 양이 적은 메리하하를 홀짝 다 마셔버린 나로서는 거기 더 앉아서 뭔가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고독한 미식가처럼 커피 한 잔에 만족해하며 최대한 쿨하게 카페를 나설 수밖에 없었다.
삼양 검은 모래 해변으로 갔다. 여행 초 잠시 들렀던 그곳 카페에서 바라봤던 풍경을 떠올리며 다시 찾은 해변은 여전히 까맣고 고요했다. 해가 기울어 가는 중이었다.
하얀 펜션 같은 건물 1층에 위치한 카페가 눈에 띄었다. 옆문이 예뻤고 정문은 바다를 향해서 난 커다란 유리창과 나란히 넓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창가 자리에 사람이 별로 없어서 혼자 조용히 한두 시간을 보내기에 좋을 듯했다. 차로 돌아가 노트북을 챙겨 나와서 카페로 들어갔다.
적당히 캐주얼하면서도 아프리카의 화사함을 본뜬 인테리어가 조화로운 실내 분위기였다. 다양한 종류의 병맥주가 진열되어 있어서 마음 같아서는 그중의 하나를 시켜 시원하게 마시고 싶었지만, 운전을 해야 하므로 참았다. 커피보다는 과일 음료가 더 끌려서 애플망고 주스를 주문했다.
통유리를 통해 보이는 카페 밖의 풍경이 무척 좋았다. 넓은 앞마당과 그 너머 바다가 시원했고, 수평선을 미끄러지듯 이동하는 배들의 모습이 운치 있었다. 여기에 더해 해변을 바라보는 커플의 뒷모습이 정겨워 한참을 바라보며 며칠 전 여자 친구와의 여행을 떠올리기도 했다.
혼자만의 기분에 취해 제주 하늘의 석양을 바라봤다. 매혹적인 붉은빛으로 온통 물드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밤을 예고하는 짙은 푸르름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무성한 야자나무 잎을 보며 얘들도 나처럼 이발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다. 짧아진 머리를 다시 만져보니 아직 어색함이 남아 있었다. 아침에 미용실에 다녀온 게 왠지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돌아다니느라 바빴던 지난 열흘에 비한다면 굉장히 한가한 하루였는데도 아침과 저녁은 유독 멀게 느껴졌다. 너무 많은 생각들로 머리가 바빠서 그랬나 보다 여겨졌다.
다시 자라날 머리카락처럼 내 여행도 다시금 온전히 나의 머리로부터, 가슴으로부터 풍성하게 자라나기를 거듭 기원했다. 그날의 여행은 그렇게 두 번째 카페에서 끝내고 숙소로 일찍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