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서귀포에서 세 여인과 실내 데이트
# 제주 숲터널(5.16도로) - 반 고흐 인사이드(전시) - 유동커피 - 이중섭 미술관
제주도에는 아침부터 비가 많이 내렸다. 다행히 일기 예보로 예상한 날씨라서 당황하지는 않았다. 서귀포 쪽에서 미술 전시와 카페 방문 등으로 차분한 하루를 보낼 생각이었다. 마침 동생이 노래를 부르던 반 고흐 전시부터 보러 가기로 했다.
일명 '숲터널'로 불리는 유명한 내륙 도로를 드라이브했다. 이름 그대로 나무 숲이 양옆으로 길게 늘어져 있어 마치 터널을 지나는 듯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도로에서 해안가를 드라이브할 때와는 또 다른 운치를 느낄 수 있었다. 차창에 부딪는 빗줄기 소리와, 빗길을 스치는 자동차 바퀴 소리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맨 처음에 동생이 반 고흐 전시를 얘기했을 때, 난 여행 와서 꼭 그걸 봐야겠냐며 핀잔을 줬었다. 하지만 녀석은 의외로 강한 의지를 보였다. 미디어 아트라 볼 것도 많을 거고 서울 전시는 작년에 끝났기 때문에 제주도에 온 김에 한 번 보고 싶다는 거였다. 비도 오고 해서 서귀포의 실내 구경거리를 찾아보다가, 아이들이 갈 만한 테마 박물관이나 잘 모르는 전시를 택하느니 동생이 원하는 걸 보기로 했다. '반 고흐 인사이드 : 빛과 음악의 축제' 전시는 서귀포 부영 호텔 지하에서 열리고 있었다.
실내 촬영이 가능한 전시라서 마음껏 사진도 찍고 포즈도 취하며 놀면서 관람할 수 있었다. 프로젝션을 통해 다양한 작품과 효과들로 고흐의 삶과 예술 세계를 감상할 수 있었다.
한 섹션에는 고흐 작품의 배경이었던 장소의 사진들이 몇 점 걸려 있었다. 이를 비치된 태블릿의 앱을 통해 비추자, 화면에는 사진이 그림으로 서서히 변환되는 모습이 나타났다. 미디어 아트와 증강 현실 기술을 잘 활용한 전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모네 전시에서도 느꼈지만, '빛'을 주요 테마로 잡고 미술전시에 미디어를 활용하는 방식은 확실히 갤러리의 표현 범위를 확장시켰다고 여겨졌다. 커다란 스크린 화면에 가득한 유화에서 생동감이 느껴졌고, 그 사이를 지나다니는 내 실루엣을 사진으로 보니 명암의 대비가 도드라졌다. 촬영을 한 동생은 이렇게 말했다. "오빠, 명탐정 코난 만화 있잖아. 거기 나오는 범인 같아."
유화 꽃밭에 선 엄마와 동생의 사진을 찍었다. 고흐의 생애든 작품이든 전시가 무얼 보여주려 하는지에 상관없이 그저 우리끼리 즐길 수 있으면 관람은 이미 성공이었다.
비가 제법 내리던 평일 오전, 서귀포 부영 호텔 지하의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 식구들끼리 아주 여유롭게 관람했다. 중간중간 놓인 소파에 앉아 긴 화면 가득한 고흐의 유화를 보고 있노라면 그 화려한 색감이 더 강렬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한 번은 작품을 바라보는 엄마와 이모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뭐라 말씀을 나누시길래 그림에 대한 얘기인가 싶었는데,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우고 계셨다. 커피 한 잔이 필요해 보였다. 관람 후에 카페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모두가 만족한 관람이었다. 생전에는 고독하리만치 내면의 예술혼과 영감에 몰두했고, 결국에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빈센트 반 고흐. 비 오는 날의 실내 전시가 만약 그의 생애라든지 작품 세계에만 너무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자칫 우울한 관람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반 고흐 인사이드 전은 미디어 기술을 다채롭게 활용한 전시였던 덕분에 비교적 재밌었고 심지어 유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전시장을 나와서 우리는 약간 늦은 점심 식사를 했다. 중문 관광단지 부근에 많은 전형적인 '관광지 식당'들은 나름대로 피해서 찾아갔음에도 약간은 실망스러운 식사였다. 캐주얼한 스타일의 음식으로 젊은 커플이 많이 찾는 걸로 인터넷에 알려진 맛집이었는데 음식의 양이나 맛에 비해 가격만 지나치게 높았다. 커플들은 그런대로 만족하는지 몰라도 일단 엄마들을 사로잡지 못했으니 좋은 식당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그전까지 별다른 검색을 하지 않고도 들어갔던 식당들 대부분이 좋았기 때문에 방심했던 탓에 한 끼를 낭비한 듯하여 못내 아쉬웠다. 역시 여행에 있어 맛집 선택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되새겼다. 직접 검증했거나, 상세히 검색해서 만족할 만한 요소가 분명한 맛집을 골라야 하는 것이다. '항상 만족할 수가 있겠느냐'며 아쉬운 선택은 또 그런대로 받아들이는 게 물론 좋을 때도 있지만 적어도 엄마와 이모를 모시고 다닐 때는 실패를 최소화해야 한다.
맛집 선택의 실패를 만회하는 데는 '유동커피'에서의 커피 한 잔이면 충분했다. 넷이서 아메리카노 A, B, C를 골고루 주문해서 번갈아 맛보며 분명한 풍미의 차이를 느꼈다. 원두의 종류에 따른 각각의 고유한 맛과 향이 모두 좋았다. 더욱이 워낙에 착한 가격인지라 엄마와 이모는 정말 좋은 카페라고 칭찬하셨다.
내가 그곳을 첫 번째로 방문했을 때 워낙에 인상 깊어서 비교적 길게 리뷰를 남겼으니 카페에 대한 정보는 링크로 갈음하면 될 것 같다.
https://brunch.co.kr/@hyuksnote/45
종일 주룩주룩 내리는 빗소리에 익숙해졌을 법도 했지만, 창가 자리에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며 보고 듣는 창밖의 정취야말로 비 오는 날만의 특별함이었다. 비록 물끄러미 내다보이는 전망이 해안가나 한적한 전원이 아닌 일반 도로였을지라도, 유동커피의 실내 테이블은 충분히 매력적이고 아늑했다. 머그잔을 비우고도 어느 정도 식을 때까지 넷이서 반 고흐 전시에 대해, 여행에 대해 이야기 나누며 오후 시간을 보냈다.
커피맛에 만족한 이모가 드립백 제품 한 패키지를 구입하다가 내 것까지 사 주시며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이드 해 주는 조카를 격려해 주시기에 충분한 선물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드립하여 향긋하게 내어 드렸더니 아버지도 만족하신 커피였다.
비는 여전히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다음 행선지는 내 머릿속에 이미 있었다. 카페에서 정말 가까이에 있어 차로 이동해 주차하기까지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중섭 거리 옆쪽의 길을 따라 이중섭 생가 주위로는 돌담과 정원으로 꾸며진 공간이 있다. 여기 있는 계단을 오르면 소박하고 작은 미술관 건물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이중섭 미술관이다. 각자 우산을 펴고 비에 젖은 길을 조심히 디뎌 밟고 오르다 보니 그게 또 제법 운치 있는 산책이기도 했다.
이중섭의 대표작인 황소 그림과 조각 앞에서 처음부터 재롱을 부렸다. 소띠인 너와 딱이라며 우리 엄마가 참 좋아라 하셨다. 눈을 부릅뜨고 황소의 기운을 표현했어야 하는데, 그런 엄마 앞이다 보니 재밌게 보이느라 표정이 다소 꺼벙해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오빤 원래 그렇다'던 동생의 한 마디가 있기는 했다.
이중섭 미술관은 1층의 상설 전시실과 2층의 기획 전시실로 나뉘어 있었다. 이중섭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연표와 사진, 작품 등이 있는 1층에서 그의 생애를 간략히 살펴본 후 2층으로 올라갔다. 마침 기획 전시실에서는 '내 사랑, 패밀리'라는 주제로 이중섭이 가족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이 여러 장 걸려 있었다. 화가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이나 소개가 아니라 편지에 쓰인 글을 통해서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깊이 들여다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중섭은 생활고로 인해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고 홀로 외롭게 지냈다. 유학 시절 만나서 결혼한 아내가 일본인이었으므로 자신을 제외한 식구들은 일본에 있는 처가에 의탁해 살아야 했던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정성껏 쓴 편지에는 글과 함께 간단한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특히 이중섭이 가족들을 태운 소 달구지를 끌고 가는 그림에서는 온 가족의 희망과 행복을 염원한 작가의 마음이 잘 느껴져서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그러한 이중섭의 편지와 그림들을 엄마와 이모, 나와 동생 모두는 반 고흐 전시 이상으로 몰입하여 감상했다. 어느덧 문을 닫아야 할 시간이라는 안내에 비로소 미술관에서 나왔을 정도였다. 사실 방문하기 전에는 전시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았다. 게다가 관람료가 매우 저렴한 작은 미술관이라 도착해서도 별다른 생각 없이 보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깊은 여운을 느꼈던 이중섭 미술관이었다.
예술에 대한 열정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었던 경제적인 어려움. 힘겨운 현실을 견뎌내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작품 활동을 이어갈 수 있던 이중섭의 에너지는 바로 가족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마침 엄마, 이모, 동생과 함께 전시를 둘러본 나로서는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볼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으니, 이중섭 미술관의 기획 전시에 굉장히 감사한 일이었다.
밖으로 나와 이중섭 문화거리를 잠시 둘러봤다. 주로 기념품 상점들이 있었는데, 비가 워낙 많이 내렸고 언덕길이라 많이 걷지는 않았다. 큰 가게에 들어가서 구경했는데 이중섭의 작품이 그려진 좋은 상품들이 많았고 가격도 합리적이었다. 이것저것 꽤 골라서 샀는데 특히 붉은 황소 그림이 그려진 작은 액자가 퍽 마음에 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밖은 이미 어둑어둑했다.
숙소로 돌아가려면 차를 타고도 한참이 걸리는 거리였으므로, 더 어두워지기 전에 길을 나섰다. 옷이며 신발이 흠뻑 젖어서 꿉꿉했지만, 다들 마음만은 보송보송한 그런 분위기였다. 내가 제주에서 겪은 날들 중에서도 가장 비가 많이 왔던 만큼 실내를 구경해야만 했는데, 그에 걸맞게 하루 종일 잘 다녀서 참 다행이었다. 물론 서귀포에 다른 좋은 곳들도 많지만 어쨌든 그날은 그 코스가 최선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Art day였던 셈이다. 엄마, 이모, 동생과 제주도에서 보내는 3일 차에 접한 반 고흐와 이중섭 두 예술가 사이에는 마침 큰 공통점이 있었다. 이는 내 생각만이 아니었고 이중섭 전시의 안내 글귀에도 간략히 언급된 바 있기에 공감이 갔다. 자살로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짧은 기간에 많은 작품을 남긴 반 고흐의 격정적인 삶과, 정신 질환과 영양실조로 병원에서 쓸쓸히 눈을 감기 전까지 단기간에 많은 그림을 남긴 이중섭의 예술가적인 운명이 매우 닮아있던 것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던가. 정말 그리도 생이 짧은 건지 아직은 실감하기 힘든 나이지만, 한 철이 멀다 하고 바뀌어 가는 세태와 유행에 견주었을 때 오랜 세월 이어져 내려와 멋을 발하는 문화 예술을 생각해 보면 정말 틀림없는 명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른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수많은 문학 작품이며 음악, 미술의 깊이와 진가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많은 곳들을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저녁이었다.
뒷 좌석에서는, '벌써 마지막 저녁'이라는 동생의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제 아무리 예술적인 여행날이라 할지라도 해가 저물어 가면 현실에 더 가까워지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