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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돌 Dec 01. 2017

제주 한달살기 Day27_1 : 제주의 물과 바람과 돌

세 여인과의 3박 4일 마지막 날 오전, 홀로 누린 자연과 건축물의 조화

# 비오토피아 수풍석 박물관 - 나 홀로 / 카멜리아힐 - 엄마, 이모, 동생  
# 세계적인 건축가 유동룡(이타미 준)의 역작





서른 날 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멋진 하루였다. 자연과 건축물의 조화란 이런 것이다 라는 경험을 실컷 할 수 있었다. 엄마, 이모, 동생과 함께한 3박 4일의 마지막 날이었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수풍석 박물관과 방주교회의 기억은 그 자체만으로 강렬했다.




물과 바람과 돌을 테마로 한 박물관, 세계적인 건축가 이타미 준(유동룡)의 건축물. 이것만으로도 비오토피아 수풍석 박물관은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미리 예약과 결제를 한 인원에게만 제한적인 입장을 허용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 방문을 미루다가 이를 알게 된 건 며칠 전이었다. 다행히 내가 제주를 떠나기 전에 예약할 수 있는 날이 남아있어 서둘러 예약, 결제를 하고 방문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공교롭게도 그렇게 혼자 예약해 놓은 스케줄이 엄마, 이모, 여동생과 함께하는 마지막 날의 오전과 겹쳤다. 동생이 제주도에 오겠다고 한 날 혹시나 하여 박물관 홈페이지를 봤더니 예약 가능한 인원이 남아 있지 않았다. 같이 보지 못하는 건 아쉬웠지만 나름대로 절충안을 냈다. 내가 비오토피아에 가는 길에 셋을 근처에 있는 카멜리아힐에 내려주어 오전은 각자 보내기로 한 것이다. 

 


10시 반 관람을 위해서는 10분 전까지 '디 아넥스' 호텔 주차장으로 가야 했다. 9시에 함덕의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한 셋을 서귀포의 카멜리아힐에 내려주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려서 하마터면 늦을 뻔했다. 카멜리아힐에서 디 아넥스까지는 차로 10분 거리였는데, 초행길이라 살짝 불안했기 때문에 한적한 1차로를 급하게 질주했다. 다행히 한 번에 주차장을 찾아 대기 중인 비오토피아 셔틀버스를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가이드 여성분이 일행 30여 명을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버스에서 그렇게 안내해 주는 분의 설명을 들으며 이동하니 모처럼 '관광객'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비오토피아는 넓은 부지에 주택 단지도 있는 사유지이기 때문에 몇 년 전부터 어쩔 수 없이 관람객 수에 제한을 뒀다는 설명을 들었다. 사택 앞에서 사진을 찍는 것도 모자라 집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는 등의 행동이 이어지자 주민들의 불편이 너무 컸다는 거였다. 역시 중국인 관광객들의 소란만 탓할 게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됐다.




1. 石 박물관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에서 내려 첫 번째로 간 곳은 석 박물관이었다. 수풍석 중에서도 石이 가장 먼저라니, 이거 석작가를 환영하는 코스가 아닌가 싶어서 혼자 흐뭇했던 기억이다.

 


비오토피아 박물관은 어떤 전시물들을 구경하는 곳이 아니다. 물, 바람, 돌 각각을 테마로 한 건축물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감상하는 공간 전체가 곧 작품이다. 석 박물관은 철제 건축물 안의 채광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바닥에 있는 돌을 부각하도록 설계된 사각의 공간이었다. 외벽이 비바람에 부식되어 원래의 색과는 완전히 다른 붉은 녹빛을 띠고 있는 것도 이타미 준이 세월의 흐름을 노출하려고 한 의도라는 가이드 분의 설명에 수긍이 갔다. 녹슨 모습이 결코 낡아 보이지 않고 주변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보였기 때문이다.



가이드 분의 안내가 끝나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구경을 하던 중, 한 여성분이 채광창으로 다가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하여 카메라를 준비했더니 역시나, 위에서 쏟아지는 빛을 올려다보는 그 모습이 박물관 내부의 단조로움을 단번에 없애 주었다. 본의 아니게 몰래 찍어놓고는 허락을 구할까 싶다가도 그게 또 이상할 것 같아서 내 갤러리에만 소중히 저장했다. 이름 모를 여자 모델분께 감사드리며, 다른 데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내부가 많이 어두워서 밖이 더욱 눈부셨다. 자연의 한가운데 있는 건축물이 눈에 띄던 것 이상으로 건축물에서 바라 본 자연의 모습이 새로웠다. 어찌 보면 '아무것도 없다'라고 여길 수도 있는 건축물에서 그토록 충만한 자연미를 느낄 수 있어서 관람 초반부터 신선한 기분이었다.



바람 부는 산책로를 걸어서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가이드분의 안내가 이어졌다. 세계적인 건축가 이타미 준(한국명 유동룡)은 재일 교포로서 주 활동 무대였던 건축 선진국 일본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은 한국인이었다. 주위에서는 줄기차게 선생의 귀화를 권유했으나 본인의 강력한 의지로 끝내 국적을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한국인 건축가 유동룡을 보수적인 일본 건축계에서도 마침내 인정했던 증거가 바로 '무라노 도고상'의 수여 결정이었다. 이타미 준이 수상하기 전까지는 외국인에게 결코 허용되지 않던 세계적인 건축상의 영예가 그에게 주어진 걸 보면 그가 얼마나 위대한 건축가였는지 알 수 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한국인 유동룡의 지조가 멋졌다. 건축사무소 개업을 위해 지었다는 활동명 '이타미 준' 은 이미 충분히 유명하니, 이제는 국내외적으로 한국 이름 '유동룡'이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 風 박물관



풍 박물관의 차례였다. 마침 야외에는 제법 강한 바람이 불어와 윈드브레이커를 걸치고도 쌀쌀한 날씨였다. 한눈에 봐도 사방으로 통풍이 잘 돼 보이는 목조 건물 하나가 전형적인 '집'의 형태로 서 있었다.

    


채광과 통풍에 용이한 갈빗대(?) 형태의 나무 살들이 촘촘한 건물의 한쪽 면은 완만한 곡선의 형태였다. 바람이 더 잘 들어올 수 있도록 고안한 구조라는 설명에, 건축가가 이뤄낸 자연과의 조화에 다시금 감탄했다. 안쪽에는 양 모양의 작은 석상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이타미 준이 아끼던 일종의 '수호신'상으로, 그의 건축 사무실에 있던 애장품을 바람 박물관에 옮겨 놓았다고 한다. 제주도를 제2의 고향으로 여겼다는 그의 애정이 느껴졌다.



반대편 방향에는 돌 박물관에 있던 것보다 오히려 큰 돌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나무 틈새로 불어오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앉아서 명상을 할 수 있게 해 놓은 공간이라는 설명이었다. 간혹 설치 미술의 의미를 듣다 보면 '꿈보다 해몽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수풍석 박물관에서는 그런 의혹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만약에 의문을 품었던 다른 작품들의 진가도 알아볼 만한 수준으로 나의 예술 수준이 높아진다면, 수풍석 박물관은 또 얼마나 감탄스럽게 보일지 모르겠다.



풍 박물관에서 나와 마지막 수 박물관으로 가는 길에는 생태공원이 있었다. 연꽃이 떠 있는 작은 연못을 가로지르며 과연 물을 주제로 한 건축물은 어떠할지 상상해 봤다. 가기 전에 인터넷으로 한 번이라도 검색해 봤다면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겠지만 당시에 나는 완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어느 쪽이 확실히 좋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石, 風, 水 로 갈수록 점점 기대감이 고조되던 당시의 투어가 무척 설레는 일이었던 건 확실하다.

 



3. 水 박물관



수 박물관은 지붕이 원형으로 커다랗게 트인 아래에 물이 얕게 채워져 있는 건축물이었다. 사각형으로 된 바닥 공간이 캔버스가 되어 시시각각 변화하는 제주의 하늘을 담아내고 있었다. 맑은 물이 빛을 반사하여 만들어내는 반영(reflection)이야말로 물의 속성 중에서도 가장 포용력 있고 아름다운 특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위아래를 번갈아 보며 사진과 동영상을 찍다가 이내 감탄했다. 깨끗한 물에 까만 돌들이 자박자박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일렁이는 게 물인지 하늘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파란 하늘에 지나다니는 구름의 움직임이 마치 강물이 흐르듯 눈 아래에서 잔잔한 모습이 평화로웠다. 고개를 들자마자 바로 확인할 수 있던 '진짜'하늘도 실은 어딘가로부터 비친 반영이 아닐까 생각했다.   

 


한창 사진을 찍고 있는데 한 여성분이 내 카메라 프레임에 들어왔다. 굳이 손을 거두지 않고 한 컷을 찍고 나니 역시 아무도 없는 모습과는 다른 사진의 '주관성'이 드러나 보였다. 물 옆을 걸으며 수 박물관을 구경하는 여인의 감탄과, 그걸 맞은편에서 촬영한 나의 시선은 분명 자연 그대로의 풍경 사진에는 없던 요소인 것이다. 


그녀가 바로 앞선 내 사진의 석 박물관에서 채광창을 올려다보던 여인이었을 알아차린 건 나중이었다. 사진을 찍을 당시에는 박물관을 구경하랴 풍경에 감탄하랴 다른 관람객들을 구별해 낼 만한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사진 두 컷을 그대로 사용한 이유가 있다. 그날 수풍석 박물관에서 나의 시선이 돌, 바람, 물뿐만 아니라 '여인'을 향하기도 했음을 달리 확인하고 표현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삼다도 제주에 많다는 건 돌과 바람에 이어 물이 아닌 '여자'임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당시에 나는 며칠 동안이나 세 명의 여인(엄마, 이모, 동생)과 함께이다가 비오토피아에서 모처럼 혼자여서 스스로의 침묵이 더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다른 여인들이 과연 그곳을 어떻게 감상하는가에 조금 더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다른 의도는 결코 없었다. 관람객들 중에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많기도 했고, 정적이고 평화로운 수풍석 박물관의 분위기와 묘한 어울림이 느껴지는 건 아무래도 여성들 쪽이었다.



약간 위에서 내려다본 수 박물관은 원형의 천장이 도드라졌고, 마침 그 옆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한 여성의 모습은 그녀의 빨간 원피스보다는 건축물의 수수함을 강조시켜 줄 정도의 적당함으로 눈에 띄었다. 멀리 가운데 솟아있는 봉우리는 산방산의 모습인데, 가이드 분의 설명에 따르면 이타미 준은 제주도에서 특히 산방산을 좋아해 자신이 지은 모든 건축물 방향의 기점으로 삼았다고 한다.


약 1시간 정도의 투어를 마치고 버스에 타서도 수풍석 박물관의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부모님과 한 번, 여자 친구와 한 번 이렇게 최소 두 번은 더 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를 다시 여행할 이유가 또 두 가지 늘어난 셈이었다. 




올 때와는 달리 카멜리아힐로 다시 갈 때는 차를 천천히 몰았다. 아무래도 셋이서 더 오랫동안 구경하고 있을 터였다. 역시나 도착해서 동생에게 전화해 보니 아직 더 기다려야만 했다. 천천히 마저 둘러보라고 말해놓고 차 안에서 휴대폰의 사진들을 돌아봤다. 불과 한 시간 전에 찍은 사진들이 예술이고 감동이었다. 풍경 자체가 워낙에 훌륭하기도 했거니와, 그걸 홀로 만끽하고 사진에 담은 나 자신이 뿌듯한 기분이었다.


마침맞게도 바로 근처에는 이타미 준의 또 다른 걸작, 방주교회가 있음을 미리 알아두길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멋진 건축물과 자연을 통해 자존감이 상당히 올라간 모양이었다. 엄마와 이모와 동생이 합류하거든 바로 함께 가려고 지도를 봐 뒀다. 셋은 생각보다 한참이 지나서야 나왔지만 결코 초조하지도, 지루하지도 않은 기다림이었다. 마음이 어느 때보다 평화롭고 느긋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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