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올레길로 불리는 제주 남부의 7코스에서 한 달 여행 마무리 하기
# 국민 올레길, 7코스 : 총길이 17.4km, 소요시간 5~6h
# 외돌개/황우지 해안 - 법환포구 - 서건도 - 강정포구 - 월평포구 - 월평마을 아왜낭목
다음날 정오 무렵의 비행기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하루 일정으로 제주의 한 달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기에 좋은 코스로는 올레길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많은 코스들 중에서도 특히 '국민 올레길'로 불릴 만큼 인기 있는 7코스를 걷기로 했다. 한 달 동안 자주 가지는 못한 서귀포 남부 해안을 따라 걷는 길이라는 점에서도 내게 좋은 선택으로 보였다.
올레길 7코스의 출발은 외돌개 부근에서였다. 아침 일찍 서둘러서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올레길로 접어드는 이정표를 찾았다. 21코스 때와 마찬가지로 초입길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다가 마침내 올레길 화살표와 리본을 발견하고는 반가워했다.
외돌개는 예전에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어서 익숙했는데, 황우지 해안은 잘 모르는 곳이었다. '선녀탕'이라는 지명이 어쩐지 사우나를 연상케 하는 표지판이었는데 알고 보니 제주에서도 대표적인 스노클링 명소였다. 좀 더 그럴듯한 이름은 없었을까. 발견했을 당시에야 스노클링 같은 건 없었을 테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탕'은 좀 너무하네 싶었다. '선녀탕의 스노클링'이라 하면 마치 '갈비탕의 폭립' 같은 느낌이 아닌가.
모처럼 따라간 올레길의 순방향(진행 방향) 파란 화살표였다. 외돌개와 황우지 해안으로 시작한 7코스의 첫인상이 참으로 강렬했다. 해안가로 나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코스의 하이라이트를 일찌감치 내어 놓은 듯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돌담길로 시작했던 올레길 21코스가 "제주는 이런 곳이야"라고 앞으로의 여행을 소개해 주는 듯했다면, 해안 풍경이 펼쳐진 7코스는 "제주는 이런 곳이었어"라고 확인시켜 주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 어떤 관점을 제시했을 리는 없지만 어쨌든 나는 그렇게 올레길과 소통했다.
외돌개는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인상 깊게 구경했던 기억이 선명해서 더욱 친근한 장소였다. 다만 어릴 때는 그토록 광활하게 보였던 해안이 거듭 방문할 때마다는 조금씩 작게 느껴지며 그날도 웅장함보다는 수려함이 와 닿았다. 직접 가봤든 TV에서 봤든 호주나 뉴질랜드, 아프리카의 대초원 같이 광대한 풍경을 접하다 보니 제주의 해안이 어릴 때만큼 크게 느껴지지 않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규모의 차이란, 단지 그뿐이다. 요컨대 자금성을 가봤다고 해서 경복궁을 '작다'는 말로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고교 시절의 추억과, 10년도 더 지난 뒤 방문해서 받은 인상에는 분명한 공통분모가 자리 잡고 있었다.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해안의 절경에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가슴 벅찬 기분을 느낀 것이다. 여행지에서 한 사람이 받는 감동은 이처럼 취향과 선호에 달려있는 것이지, 장소의 규모에 따라 덜하고 더하고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계속 바다를 보며 걷다가 돌들이 가득한 해변을 지나기도 했다. 몸의 균형을 잃지 않도록 큰 돌들을 천천히 디뎌 밟자 녀석들이 달그락거렸다. 알작지 해변의 몽돌과 동백동산의 현무암, 한라산을 오를 때 밟던 돌들이 기분 좋게 떠오르는 감촉과 소리였다.
올레길에서는 파란색과 노란색의 화살표 두 개가 교차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파랑은 해당 코스의 순방향을, 노랑은 역방향을 가리킨다. 올레길 7코스의 순방향을 걷는 동시에 지난 한 달의 기억을 되살려 보고 있던 내게 두 화살표는 모두 의미가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길도, 뒤로 돌아가는 길도 결국에는 제주를 둥그렇게 휘감고 있는 둘레의 일부일 뿐이었다. 내 여행도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나아갈 길에 집중하는 일이나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는 일이나 크게 봐서는 '제주에서의 한 달'이라는 삶의 영역 안에서 크게 다르지 않던 것이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의 가장 큰 고민은 당연히 직장과 진로였다. 퇴직을 염두에 둔 휴직이었음에, 제주에서의 한 달이 그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내려줄 거라 기대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그날의 올레길에서는 돌아갈 일상이나 복직 내지는 퇴직과 같은 것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여행 초반에 산책을 할 때면 어김없이 머릿속을 채웠던 고민들 대신에 걷는 내내 지난 한 달 동안의 추억들만 떠올랐다.
일종의 마취 상태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결정하고 바꿀 수 있는 일이라면, 여행에서는 여행만 생각하자는 결론을 부지불식 간에 얻고 그에 맞춰 생각을 조절했던 듯하다. 고통을 잊기 위해서든, 치료를 위해서든 어쨌든 당시로서는 필요했던 마취라고 본다.
흰나비가 길섶의 꽃밭에서 팔랑팔랑 날아다니던 모습이 너무 예뻐서 한참을 구경하고 영상으로도 담았다. 조천 성당 부근의 풀밭에서 봤던 흰나비 떼들이 떠올랐다. 새로운 풍경에 감탄하다가도 결국 그렇게 지난 경험과의 연속성을 느끼던 올레길에서의 순방향과 역방향이었다.
코스의 중반을 훌쩍 넘겨 법환포구 인근을 지날 무렵에는 시원한 음료 한 잔이 몹시 생각났다. 수시로 물을 마시며 걷기는 했지만 갈증이 완벽히 해결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가 시릴 만큼 차가운 스무디가 아른거렸다.
그럴 때 마침 반가운 카페 하나가 눈 앞에 나타났다. '제스토리'라는 이름이었는데 센스 있는 인테리어와 기념품들로 유명하다던 가이드북의 설명이 생각났다. 과연 외부의 알록달록함에서부터 여행객들을 유혹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느껴져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시원한 천혜향 주스를 주문해 받아 들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갈증을 해결하고 나니 구경할 힘이 더 났다. 마침 한 달에 두 번만 열린다는 플리마켓인 '소랑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벨롱장만큼 큰 규모는 아니지만 다양한 판매자들이 카페 공간을 활용해 물건을 전시하여 꽤 널리 알려진 플리마켓인 모양이었다. 운이 좋았다. 앉아서 주스만 마시느니 천천히 소랑장을 둘러보는 게 올레길 투어에 더 어울리는 일이었다.
현장에서 직접 그림을 그려 넣은 엽서를 판매하는 분도 있었고, 바느질로 간단한 소품을 만드는 분도 있었다. 편백나무 방향제를 넣은 토끼 인형이 귀여워서 하나 샀다. 한 달 동안 지낸 숙소의 주인집 딸아이에게 줄 작은 이별 선물이었다. 그 밖에도 사고 싶은 물건이 몇 개 있기는 했지만 더는 짐을 늘리지 않기로 해서 지갑을 열지 않았다. 플리마켓에서의 물건 판매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다. 실컷 구경하는 사람들에 비해 정작 구매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게 봤다.
아기자기한 플리마켓과 카페 구경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보냈다. 토끼 인형을 가방에 집어넣고 다시 길을 나섰다. 마지막 저녁 식사는 숙소에서 호스트 식구들과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시간을 지켜야 했다.
올레길 7코스에 있는 서건도는 물 때가 맞는 시간에만 바닷길로 가 볼 수 있는 섬이었다. 내가 갔을 때에 마침 물이 쫙 빠져나가서 넓은 갯벌이 섬까지 이어져 있었다. 소랑장에 이어 또 한 번의 행운을 느낀 순간이었다.
굉장히 작은 섬이었다. 입구의 계단을 올라 숲길을 헤치고 돌아 들어가자 이내 반대편에 다다랐다. 바람이 몹시 불었고 절벽 바위가 거칠어서 조심조심 둘러봤다. 나 말고는 한 명만 봤을 정도로 인적이 드물었다. 올레길 7코스에 마치 나 혼자인 듯, 서건도로 향하는 바닷길이 내게만 열린 듯 기분이 괜히 좋아졌다.
서귀포 켄싱턴 리조트 주위를 빙 둘러가는 길을 지났다. 높이 솟은 야자수 아래로 잘 정돈된 보행로가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지도를 보니 최종 목적지인 월평까지는 거리가 제법 남아 있었다. 구불구불한 해안도로를 천천히 걸어온 데다 카페(소랑장)에서 시간도 꽤 보냈으니 예상 소요 시간을 넘긴 거였다. 아침 일찍 출발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걷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잠시 멀어져 내륙을 가로지르는 길로 접어들어 보니 강정천이 나왔다. 낚시를 하고 있는 분들의 여유로운 모습도 잠시,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갈등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광경이 펼쳐졌다. 잊고 있었는데, 평온한 바닷길을 계속 걷다가 지나쳐 가려니 더욱 두드러져 보이던 투쟁의 흔적들이었다.
경직된 분위기를 느끼며 딱딱한 포장도로를 한참 걷다 보니 이번에는 허기를 느꼈다. 식당에 가기에는 애매한 시각이라 눈에 보이는 편의점에 들어가서 간단한 도시락과 컵라면을 사 먹었다. 생수도 한 병 더 사서 가방에 넣었다. 남은 길은 쉬지 않고 계속 걸어갈 작정이었다.
강정마을을 지나 월평마을로 향하던 길에는 해안을 따라 쭉 뻗은 직선 도로가 길었다. 슬슬 올레길 7코스도 끝나감을 느끼며 내 여행도 저물어 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렇다고 해서 거창하거나 특별한 소회에 잠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햇살은 여전히 쨍했고 날이 더워서 하루 끝의 아쉬움과 피로감에 우선 빠져들었다.
굽이굽이 숲과 바다 사이로 들어가는 길도 좋았지만, 그렇게 사방이 탁 트여서 내가 지나온 길을 고스란히 돌아볼 수 있는 직선 길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군더더기가 없는 대신에 약간은 지루할 수 있는,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걷는 일에만 집중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런 길에서 여행자의 마음가짐을 느끼곤 한다. 단조로워 솔직한 풍경에서야말로 누구든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월평 포구를 지났다. 작은 공간에 정박한 네 척의 배가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잠시 올라타 보고 싶을 정도로 안정감이 느껴지는 작은 어선들이었다. 문득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생각났다. 그게 뭐라고, 노인이 오래도록 낚싯줄을 잡고 사투를 벌이는 내용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명작은 명작이라고 여겼던 어렴풋한 기억이었다. 포구에는 비록 단 한 분의 노인도 없었지만 손질이 잘 된 배들에서는 분명한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그처럼 혼자 걷던 올레길 곳곳에도 사람의 흔적은 짙었다. 누군가가 반드시 다녀간 길이기에 더욱 그러했으리라. 남은 올레길 7코스를 마저 걸으며 생각했다. 여행 중 내가 무얼 느꼈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다고. 같은 장소에서의 나의 감상과 타인의 감상이 어떻게 다른지를 견주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그런 비교조차 필요 없게 되지 않을까. 나의 세계는 그렇게 확장해 나가고 싶었다.
비교란 기준이 확실할 때 비로소 명확한 의미를 가질 것이었다. 밀려있는 여행기를 쓸 때 내 감정에 보다 솔직해 지기로 했다. 그럴듯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랬던 그대로를 정리해야만 나의 기준을 바로 세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월평 어귀에서 올레길 7코스 종주는 끝났다. 하지만 자연에는 일체의 분절이나 구분이 없었다. 지도 너머로 바라본 해안에는 끝도 없을 시원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 안에서 들려오는 바닷가의 푸른 소리도 여전했다.
스무 개가 넘는 올레길 코스 중에 고작 두 개 만을 경험했는데도 내가 받은 여운은 상당했다. 일 년쯤 제주를 여행했다면 서두르지 않고도 모든 코스를 완주했을 텐데, 그런 후에는 어떤 감상과 성취감이 있을지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단지 '두 개의 코스'라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올레길의 풍경을 온전히 마음에 담아왔음에 만족했을 뿐이다.
그리고 벌써 한참이 흐른 지금, 그때의 다짐처럼 솔직한 나의 기준을 세웠는가 하고 지난 여행과 여행기를 또 돌아보고 있다. 올레길 뿐만이 아니라 내가 다닌 제주의 곳곳에 파랑(순방향), 노랑(역방향) 화살표의 흔적이 분명히 있다. 나름대로 이 코스의 끝을 향해 잘 가고 있지 않나 위안을 삼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