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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돌 Dec 14. 2017

제주 한달살기 Day30 : 30박 31일째의 평범함

제주에서 다시 김포로, 한 달 여행의 종료.

# 숙소 정리 - 렌터카 반납 - 제주 공항 - 김포 공항  
# '슬슬 집에 갈 때가 됐네' - '이제 뭐 하지?'




30박 31일이 지났다(마지막 날이 31이 아닌 30일인 이유는 제주도에 도착한 다음날부터를 여행 1일로 잡았기 때문). 지난달 중순에 집을 떠났을 때만 해도 다음달 중순이라는 건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을 시간이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랬던 30일이 다 지난 거였다. 어쨌든 한 달을 꽉 채운 여행에서는 참 많은 일이 있었지만 지나고 보니 역시 짧게도 느껴졌다.



아침에 일어나 짐을 마저 정리했다. 어젯밤에 옷가지며 잡다한 물품들은 다 챙겨놓았기 때문에 시간을 많이 들이지는 않아도 됐다. 마지막으로 사용한 세면도구며 화장품 같은 것들을 가방에 넣고 이불을 정리했다. 바닥도 한 번 쓸어서 머리카락과 먼지들을 쓰레기 봉지에 담아 버리니 제법 도착했을 때처럼 새 방 같았다. 어디까지나 게스트의 입장에서겠지만.


좋은 숙소였다. 장기 숙박 전문 업체도 아니었고, 독채를 임대한 것도 아니었기에 오히려 호스트 개인의 호의와 배려에 기대어 받은 편의가 많았다. 에어비앤비를 통한 일종의 홈 셰어링 형태였고 한 달 손님은 내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게스트는 게스트대로, 호스트는 호스트 대로 실제로 지내면서 알아간 것들이 많았다.


종일 밖을 다니느라 아침 저녁으로만 개인실과 공동 공간(욕실, 부엌)을 이용한 나로서는 머무는 시간 동안의 독립된 공간성을 조금 더 필요로 했다. 반면 위층에 외국인 카우치 서퍼를 들일 정도로 문화 교류에 적극적이던 호스트는 여행객으로부터의 어떤 신선한 자극 내지는 적극성을 기대했던 것으로 짐작한다.


이렇듯 각자의 입장이 완벽히 들어맞을 수는 없었지만, 6살 딸아이를 지닌 여성 호스트와 홀로 여행 온 청년 게스트의 공존 치고는 썩 괜찮은 한 달이었다. 각자가 에어비앤비 홈페이지에 남긴 서로에 대한 좋은 후기가 이를 증명한다. 뭐랄까, 써내면서는 어쩐지 학기가 끝난 후의 강의 평가 같다는 느낌을 받기는 했다만.


그 기준이 가격선이든, 새로운 장소와 인연에 대한 기대든 한 달이나 머물 숙소를 정하는 일에 웬만한 사람이라면 신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굉장히 간단하게 정해버린 편이었으나 다행히도 좋은 인연을 만나 무탈한 한 달을 보냈던 것 같다. 여행에서의 한 달 숙소에 대해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운과 인연을 믿는다면 홈 셰어링을,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독채를 사용할 것.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느지막이 숙소를 나섰다. 정오 무렵의 비행기라 다른 곳을 들를만한 여유는 없었고, 바로 공항 쪽으로 가서 렌터카를 반납하고 여유 있게 공항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한 달 빌린 차량이라고 해서 반납 과정이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내가 들렀을 당시에 렌터카 지점은 사람들로 붐볐는데, 그 때문이었는지 간단한 차량 확인만 받은 후 짐을 챙겨 나올 수 있었다. 한 달 동안 꽤 정이 많이 든 경차였는데, 너무 간단히 작별하자니 어쩐지 허무할 정도였다.


좋은 렌터카였다. 비록 여행 중반부터 워셔액이 부족했고 에어컨 가스가 충분치 않은지 한낮에는 아무리 에어컨을 세게 틀어도 냉기가 부족하다 싶은 아쉬움이 있었지만, 나머지는 다 괜찮았다. 아, 11일째 글에서 언급했던 차량 종합검사 에피소드(https://brunch.co.kr/@hyuksnote/42) 로 언짢았던 기억이 하나 더 있다. 


이 세 가지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내가 빌렸던 하얀 모닝은 꽤 괜찮은 자동차였다. 처음으로 경차를 사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좁은 도로와 작은 해변 등을 다니기에 여러모로 적합했다. 1차로에서 종종 앞차가 너무 느려서 앞서가고 싶은 욕구를 느낄 때는 엑셀의 힘이 부족해서 추월은 포기해야 했지만, 그 덕에 위험하고 무리한 주행을 하지 않았다고도 생각한다. 제주 산간 도로에서는 확실히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다니는 게 좋았다.




이렇듯 여행을 하면서 완벽한 숙소, 완벽한 렌터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한 달 여행에서의 대표적인 깨달음이다. 물론 단기간의 여행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는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30박 31일의 경험이 3박 4일보다는 확실하지 않나 생각한다.

완벽한 문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인상적이었던 문장이 마침 떠오른다. 내 맘대로 해석하고, 내 맘대로 확장하자면 '완벽한 여행이란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역시 부족한 점을 보느니 충분하고 좋은 점을 보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 제주 여행에서의 숙소와 렌터카뿐만 아니라 동행이나 일정 등 여러 가지 사항들을 아무리 떠올려도 대개는 좋은 기억이 안 좋은 기억들에 앞선다.

 




누군가를 배웅하고 돌아서기만 하던 제주 공항이었다. 이번에는 직접 안으로 들어가서 김포행 티켓을 발권하려니 그제야 비로소 집으로 간다는 실감이 났다. 그런데 수속을 마치고 나자 렌터카 반납과 마찬가지로 허탈한 기분마저 들었다. 한 달을 지내다가 돌아가는데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절차가 빠르고 간단해서였다. 공항 직원이 "제주에서의 한 달은 어떠셨나요?"라는 질문이라도 해줬더라면 느낌이 좀 달랐을지는 모를 일이다.


비행기 탑승까지는 시간이 약간 남아서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가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며 기다렸다. 멀뚱멀뚱 다른 사람들 구경을 하고, 휴대폰으로 웹서핑도 하며 시간을 때우다 보니 문득 지난 한 달의 여행이 꿈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꿈만 같다'는 감정의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깨어났을 때 시간이 무지막지하게 빠르게 지난 것 같은 그런 의미에서의 꿈 말이다. 꿈을 꾸고 있을 때는 한없이 거기에 빠져들다가도, 깨어나면 언제 그런 꿈을 꿨냐는 듯 꿈의 내용은 쉽게 흩어지고 일상의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법이다. 


제주에서의 한 달 여행이라는 긴 꿈에서 깨어났다고 해서 아쉽거나 섭섭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시간이 충분히 길다고 여겨졌거나 여행에 싫증이 났던 건 결코 아니었다. '슬슬 집에 갈 때가 됐네' 정도로 제주 공항을 떠나던 기분을 요약할 수 있겠다.





김포 공항에는 여자 친구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마침 주말이라 내가 서울로 돌아와서 재회 겸 데이트도 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얼굴이 새까맣게 탔다며, 같이 여행할 때만 해도 안 그랬는데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여행 막바지에 올레길과 자전거길에서 햇볕에 너무 오랜 시간 노출됐다. 그전까지는 햇볕 차단에 신경을 쓰느라 모자도 쓰고 자외선 차단제도 충분히 발랐는데, 이틀 정도 방심해 버렸더니 내가 봐도 시커멓게 그을려 버린 거였다. 한 달간 피부에 누적된 자외선이 어느 순간 팟 하고 색을 변화시켰을 리는 없고, 올레길에서 태닝 한 번 제대로 한 셈이다.



김포 공항에서 잠실로 가는 직행 버스를 타고 롯데월드 타워로 갔다. 특별한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공항 밖을 나섰을 때 잠실행 버스가 눈에 띄었고, 모처럼 서울에서 데이트할 장소로 롯데월드 몰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차창 너머의 바깥 날씨가 워낙 화창했고, 특히 한강뷰가 멋졌던 기억이다. 제주도 제주지만 서울 역시 날이 좋으면 제법 그럴듯한 여행지로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높이 솟은 마천루를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한 달 내내 병풍처럼 솟아있는 한라산만 바라보다가 모처럼 삐죽한 고층 빌딩을 가까이서 올려다보니 참으로 눈부셨다. 번쩍번쩍한 실내와 각종 명품 매장들은 더욱 그러했다. '저 가방 하나면 제주도에서 한 달을 살고도 남을텐데...'라는 생각에 자본의 상대성에 대해 잠시 떠올려 보기도 했다. 그다지 영양가 있는 생각이라 여겨지지는 않았다만, 의미는 있었다고 본다.



늦은 점심으로 피자와 파스타를 먹었다. 한 달 동안 먹지 않던 메뉴라 메뉴판만 보고도 군침이 돌 정도였다. 허겁지겁 먹는 나를 보며 여자 친구는 무슨 군대 휴가 나온 남친 사 먹이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냐고, 나는 내가 오지탐험이라도 하다가 온 사람 같다며 같은 듯 다른 표현을 내뱉고는 여전히 우물거렸다. 이탈리아에서 한 달을 살면 과연 피자와 파스타가 질릴까?




   

집은 역시 편안했다. 강아지 두 녀석이 한 달 만의 재회를 격하게 반겼는데, 평소에도 워낙에 반가워하기 때문에 그게 오랜만이어서 그랬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서 쉬려니 익숙하면서도 낯선 게 하나 있었다. 다음날 어디에 갈지 떠올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눈 앞에 나란히 엎드린 강아지들을 흐뭇하게 쓰다듬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이제 뭐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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