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고미 Oct 15. 2020

10. 스웨덴의 '삼보'

'결혼'이라는 제도보다는 '삼보'의 개념이 더 보편적인 스웨덴 사람들

남편과 나는 한국에서는 혼인신고를 한 법적 부부관계이다.


나는 원래 남편을 만나기 전 결혼을 내 인생에서 염두해두고 살지 않았다.

미래를 함께 하고 싶은 남자를 만나면 같이 살아도 되겠구나 생각은 했었지만

결혼이라는 걸 해야 할까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았다.

어딘가에 얽매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향이기도 했고

나 하나 감당하기도 좀 벅차기도 했고

당당하게 내 의사를 밝히면서 살기에는 또 소심하고...(싫으면 얼굴에 티가 많이 나긴 하지만)

아무튼 집안 대소사 신경쓰고 다른 사람에 맞추어 살아가는 

소위 '결혼'이라는 것이 그냥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20대에는 아무 생각없이 연애만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30대에 접어드니 결혼이라는 게 꼭 필요한 걸까 계속 고민이 되었다.

20대 후반에 들어서 만나게 된 지금의 남편.

같이 살아 볼까라는 생각을 처음 들게 한 남자였다.

처음엔 외국인이라서 혹시나 가볍게 나를 생각하는 건 아닐까

나혼자 많이 재고 따지고 했던 것 같다.

내 성격이 숨기면서 재고 따지는 건 잘 못해서 대놓고 말했다. 

나는 너를 계속 시험하고 있는 거라고.

학벌, 집안 배경, 이런 것보다는 

이 남자의 성향이 나와 얼마나 맞는지가 중요했는데

대체적으로 우린 참... 다르다!

그래도 서로의 다른 점을 우리는 바꾸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봐준다. 그게 좋았다.

배경이 아닌, 직업이 아닌, 있는 그대로 현재의 '나'를 봐준다는 것.

그래서 그런지 남편의 가족들은 나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냥 가족처럼 대해주고 자주 보진 않아도 그냥 친근하게 대해 주었다.

이미 성인인 남편에게 전적으로 모든 결정을 맡긴 채.

문제는 우리 집.

시골에 사는 부모님한테 남편, 당시 남친의 존재를 말하기가 정말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어찌어찌 타이밍 잘 맞춰 말은 했는데 외국인이라는 말에 돌아온 건 침묵...

그렇게 남편을 소개하고 우리 시골집에서 며칠을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심성이 온화한 편인 남편을 우리 부모님도 

처음에 외국인이라는 것 때문에 반대 분위기였다가 

겪어보니 언어가 통하진 않아도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느껴서일까

우리가 미래를 함께 약속하고 만나는 걸 받아들이셨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는 결혼식.

나는 결혼식이 너무나 하기가 싫었다.

한국에서의 결혼식은 결혼을 축하는 자리가 아닌 수금의 자리라는 걸 느꼈고

청첩장을 받아서 온 하객 역시 돈을 내야 하는 부담을 갖고 오는 자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사회생활하면서 돈 내러, 단지 얼굴을 비춰야 하는 상사의 자녀의 결혼식을 다니면서

결혼식이 정말 오롯이 축하하는 자리가 아님을 느꼈었다.

그래서 나는 결혼식은 안하고 사진만 찍자고 주장했다.

결혼을 안하겠다는 내가 미래를 함께하고자 하는 사람을 만났고 

그리고 혼인신고를 하겠다는 것에는 아무말 없던 우리 부모님은 

결혼식을 안하겠다는 말에서 노발대발 화를 냈고 

크게 감정이 상한 채 한동안 연락도 없이 지냈다. 

우리 남편도 크게 나와 의견이 다르지 않았다. 

사실 내가 결혼식을 하자고 하면 따라 왔을 수도 있지만

친구나 가족이 많지 않은 남편에게는 결혼식은 엄청난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정말 나를 축하해 줄 친구는 몇 안되고 

안친해도 불러야 하는 직장동료와 거의 부모님의 지인들로 채워질 결혼식은 정말이지 아니라고 생각했다.


과연 결혼식은 누굴 위한 자리일까?

나는 웨딩드레스나 사진촬영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에

결혼식은 결코 하고 싶지 않았고 

만약 코로나가 아니였다면 

나의 가까운 지인들만 불러서 밥을 같이 먹으며

축하하는 자리만 만들고 싶었는데 그게 불가능해서 아쉬웠다.


우리 나라는 법적으로 '결혼'이라는 제도가 중요하다.

결혼식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겠지만 

우리나라에서 동거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고

남녀가 오래 사귀면 자연스레 결혼을 염두해두고 만나거나 

아님 헤어지는 결과를 만들게 된다.


이에 반해 스웨덴은 결혼이라는 법적 제도를 거의 신경을 안쓴다고 한다.

대신 '삼보'라는 제도가 있다.

우리 커플이 서로를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가장 고민한 것이 어느 나라에서 같이 살까였다.

남편은 한국에서는 결혼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기에 

한국에서 혼인신고를 하는 것에 있어서 본인이 먼저 하자고 할 정도로 

서류상으로 부부가 되는 것에 반감은 없었다. 

그리고 본인도 한국이라는 나라를 너무 좋아하니 서류상으로 혼인신고를 하고 

나중에 본인이 결혼비자를 받아 한국에서 살 수도 있지 않겠냐며 나를 설득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할 무렵 

나는 한국도 물론 좋지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회의감도 들고 

뭔가 새로운 도전으로 한국 밖에 나가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맨날 일하고 불만을 토로하는 것과는 달리 

남편은 자기 일도 너무 좋아했으니까

남편보고 다 포기하고 한국으로 오라는 것은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 결정인 것 같았다.


그래서 작년 8월 나는 스웨덴 삼보 비자를 신청했다.

스웨덴에서는 동거인을 '삼보'라고 부른다. 

스웨덴에서는 같은 주소를 공유하는 커플을 삼보 관계라고 부르는데

요즘에는 결혼보다 삼보 관계로 살고 있는 커플이 훨씬 많다고 한다.

남편의 직장 동료들도 법적 결혼한 부부가 아닌 삼보 관계에서 아이도 키우고 살고 있으며

남편의 가장 친한 친구도 10년 이상 삼보 관계로 사실상 같이 살고 있다.

이렇게 삼보 자체가 전혀 부정적인 이미지 없이 그냥 같이 사는 배우자인 셈이다.

(다른 사람한테 소개할 때도 '아내'라는 말을 쓰면 옛날식 표현같은 느낌이 들고

그냥 '삼보'라고 소개하거나 '여자친구'라고 소개하는 것이 요즘에는 보편적이라고 한다.)


나도 스웨덴식 삼보가 되기 위해 작년 8월 삼보 비자를 신청하고

올 6월 주한스웨덴대사관에서 인터뷰를 받았다.

여러 후기들을 통해 비자 발급에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을 예상했지만

1년을 넘기고 추가 서류를 제출하고 시간은 계속 지체되니 너무 지쳤었다.

9월이면 당연히 비자가 나올 줄 알았는데 비자가 나오질 않아

여러 차례 문의한 결과(스웨덴 관공서는 연락해서 답변을 받기가 너무 힘들다.)

무비자 입국은 가능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야 

지금 진행되는 비자발급절차가 다시 진행된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 있는 나의 자취집 계약 등 현지 상황을 고려하여 

나의 모든 짐을 미리 스웨덴으로 보내고

우선 9월에 무비자입국으로 스웨덴에 와 있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중요한 결혼이라는 관계가 과연 누굴 위한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직은 우리나라에서 동거라는 게 법적인 효력이 없으니 

물론 동거가 긍정적으로 보여지긴 힘들겠지만

'결혼'이라는 제도가 한 개인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들어 줄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살면서 행복하고 싶어서 '결혼'을 했다. 

결혼식이 아니라 결혼을 택했고

스웨덴에서는 삼보가 되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국제커플이라 스웨덴에서도 혼인신고가 필요해질 경우가 생길지도 모르나 

우리는 서로가 함께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에 

함께 있을 곳이 어디든 그 곳에 맞게 준비하고 살아갈 생각이다.

삼보가 보편적인 스웨덴인 남자와 결혼이 보편적인 한국 여자가 만나서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이 순간이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하고 행복한 순간이다.


작가의 이전글 09. 스톡홀름 벗어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