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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고미 Jan 24. 2022

27. 냄비밥짓기

밥보다 빵이었는데 어느 새 난 밥이 꼭 필요한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

 한국에 살면서 냄비밥을 지어 본 기억은 없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땐 당연히 엄마가 해 준 밥을 먹었고 대학에 가서는 기숙사 또는 식당에서 밥을 먹었고 자취를 할 땐 꼭 이사 첫날 전기밥솥을 안고 갔던 기억이 있다. 돈을 주고 사먹거나 아님 버튼을 한번 누르면 만들어 지는 밥이 전부였는데 전기밥솥이 없는 이곳에선 밥을 짓는 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막막하게 여겨졌다.


쌀로 만든 밥이 당연하다가 어느 샌가 전자렌지로 돌리기만 하면 되는 간편식이 등장한 후, 밥솥은 점점 제 기능을 잃은 듯 자리만 차지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전기밥솥의 필요성을 많이 못 느끼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전기밥솥의 빈자리가 정말 크게 느꼈졌다. 여기, 스웨덴에서의 삶에서...


한국에서 먹던 찰기있는 쌀을 고르는 것부터 시작된 나의 밥짓기 여정.

스웨덴마트에서 파는 여러 종류의 쌀을 사먹어보고 그나마 한국에서 먹는 맛과 비슷한 쌀을 골랐다.

쌀이라고 하면 여기선 동남아에서 보기 쉬운 흩날리는 찰기없는 쌀이 많다. 그나마 내가 정착한 쌀은 이탈리아에서 수입해 온 grötris라는 종류의 쌀이다. 살짝 동글동글하게 생겼는데 밥을 지으면 찰기가 느껴진다. 조금 돈을 더 주고 산다면 스시용 쌀도 있는데 가격이 거의 2배가 넘어서 나는 가성비가 좋은 grötris를 산다.


그리고 두 번째 적당한 냄비를 찾아야 했다.

기본 조건은 뚜껑이 있는 냄비. 남편이 갖고 있던 제일 작은 냄비에서부터 시작해서 

둘이 먹기에 적당한 양의 밥을 지을 수 있는 냄비를 골라 장만했다.

냄비에 쌀을 씻어 넣고 쌀과 동량인 물을 넣고 밥을 하는데 불 조절이 중요했다.

처음엔 그냥 바글바글 끓여보기도 하고 중불로 유지해보기도 하고 여러 시행착오 끝에

처음엔 센불로 그리고 중불로 그리고 약불로 불조절하는 것도 익혀 갔다.

한국에선 가스레인지가 익숙했는데 스웨덴에 와서는 대부분 인덕션 스타일의 화력으로 밥을 해야 해서 좀 낯설게 느껴졌다.

스웨덴에서도 아직 가스레인지를 쓰는 집들이 있지만 점차 인덕션스타일로 바뀌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환경적인 측면에서 인덕션이 더 낫다고 들은 거 같다. 요리 맛만 본다면 난 가스레인지가 나은 것 같지만 말이다...


그렇게 냄비밥이 익숙해질 때쯤 주물냄비에 대한 관심이 솟아났다.

냄비면 그냥 뚜껑 달리고 모양만 조금씩 다른 게 전부인 줄 알았는데 주물냄비라는 것이 있다는 걸 여러 프로주부님들의 블로그, 요리 유튜버들의 영상을 통해 알게 되었다.

가격을 보고 이것저것 찾아보다보니 이게 쉽게 장만할 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몇달을 고민하고 여러 브랜드를 찾아보다가 내 인생 첫 주물냄비, 스타우브를 사게 되었다.

사이즈를 고를 때는 좀 큰 냄비가 좋을 것 같아서 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둘이 해먹기엔 좀 큰 냄비였지 않나 싶다. 


그래서 막상 사 놓고선 밥을 지을 생각은 못하고 여러 요리들을 하면서 써먹었다.

맨 처음 남편이 요리하겠다고 스타우브를 사용했다. 

로스트비프(?) 같은 요리였는데 인덕션으로 조리하다가 오븐에 넣어서 익혀가는 그런 요리였다.

주물냄비 특성상 전자렌지 외에 거의 대부분의 열기구에 사용이 가능해서 

인덕션에서 오븐으로 옮겨가는 요리를 하기에 편리했다. 

지난 추석 언저리에 해먹은 갈비찜. 스웨덴에서 갈비찜을 할 생각을 못했는데, 센트럴 근처에서 한국음식에 맞게 고기를 썰어준다는 정육점을 알게 되서 남편을 심부름 보냈다. 어차피 센트럴로 출근하는 남편에게 퇴근길에 고기 좀 사오라고. LA갈비를 만들어보고 싶어서 여러 영상, 블로그 레시피를 추려서 재료를 준비했다. 그런데 남편이 사 온 LA갈비는... 얇게 저며 썰어진 게 아니라 그냥 한 덩어리의 고기였다. 순간 이걸 어떻게 요리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뼈가 분리된 사이사이에 토막을 내서 갈비찜을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급하게 백종원님의 유튜브 레시피를 참고해서 갈비찜을 만들었다.


스웨덴에 와서 난생처음 만들어보는 요리가 참 많았는데 그 중 하나였던 갈비찜.

밥과 함께 먹기 딱 좋았지만 손도 많이 가고 시간도 꽤 걸렸다.

그래도 일년에 한 두 번 해먹기엔 괜찮았던 거 같다. 남편의 실수 덕분에 먹게 된 갈비찜 요리:)

스타우브 냄비로 가장 많이 해먹었던 요리는 찜닭이다.

한국음식 중에 뭐가 제일 좋냐고 남편한테 물으면 이것저것 다 먹고 싶어하지만 그 중 손가락에 꼽게 좋아하는 음식이 바로 찜닭이다. 그래서 여러 레시피로 찜닭을 해주곤 했는데 가장 간편하게 맛을 내는 찜닭레시피는 바로 콜라찜닭! 설탕대신 콜라를 넣어서 단맛을 내는데 캐러멜색소를 넣지 않고도 꽤 진한 색을 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레시피로 만든 후로 우리는 여기에 정착해서 항상 만들어 먹고 있다. 부가로 떡볶이떡이나 납작당면까지 넣어주면 정말 푸짐한 식사가 된다. 스타우브 냄비를 꽤 큰 걸 사서 그런지, 아님 우리 손이 커서 그런지 한 냄비 가득 끓이면 두 끼는 거뜬히 해결된다.

스웨덴에는 한국처럼 닭볶음탕용이나 토막으로 썰린 닭고기를 구하기 힘들다. 닭가슴살이나 닭다리, 날개로 부위별로 팔긴 하는데 닭 한마리를 통째로 먹고 싶으면 그냥 통닭으로 사서 직접 손질을 해서 먹는 수 밖에 없다. 나는 못하겠고 남편한테 부탁하니까 서슴없이 칼로 숭덩숭덩 닭을 토막내준다. 잡내 제거로 물에 한번 데치듯 삶아주고 요리를 하면 맛있는 찜닭을 손쉽게 만들 수 있다.



스웨덴에서 처음 만든 요리 중 하나인 곤드레밥.

성인이 되고 나서야 처음 접한 음식인데 곤드레라는 나물을 쌀과 함께 지어서 양념장에 비벼 먹는 별미였다.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스웨덴에선 한국 나물이 귀하다보니 쉽게 구하기가 어려웠다. 생나물을 가져올 수 없어서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건나물을 파는 걸 알게 되었고, 여러 건나물 중에서 내가 고른 게 바로 곤드레나물이었다. 밥 지을 때 그냥 같이 넣기만 하면 된다는 간편키트.

밥 지을 때 들기름을 살짝 두르고 하면 밥이 더 고소하고 맛있어진다는 데 들기름이 없어서 아쉬웠다.


이 스타우브는 앞서 만든 요리와 다른, 두 번째 구매한 스타우브 냄비이다.

앞서 요리한 스타우브는 사이즈가 큰 편이라 자주 손이 가지 않았다. 찜 종류나 뭔가 양이 많은 음식을 해야 할 때만 찾게 되더라. 무게도 무겁고, 무겁다보니 세척도 쉽지 않아서 자주 찾게 되지 않아서 아쉬웠다. 그러다가 고민고민해서 사게 된 조금 작은 사이즈의 둘이 먹기 딱 맞는 스타우브. 새해 맞이 새로 장만하게 되었다. '새해'니까라는 이상한 핑계로 구매한 스타우브. 사기 전에 이게 마지막 주물 냄비가 될 거라고 다짐하고 샀다. 과연...

기존 냄비밥 짓는 방식에서 곤드레 나물만 넣어서 지었다. 곤드레를 생전 처음 먹어보는 남편이 혹시나 낯설어할까봐 곤드레나물 포장지에서 알려주는 방법의 2배의 쌀로 밥을 지었다. 그래서 비율이 조금 적어보일 수 있다. 다행히 남편은 곤드레밥을 맛있게 먹었다.

양념장과 함께 먹음 간단하면서도 뭔가 건강한 느낌이 나는 그런 식사가 되었다.


냄비밥을 한창 해먹던 중 스웨덴, 스톡홀름에 잠깐 출장오신 교민으로부터 중고 전기밥솥을 나눔 받기도 했다. 블로그로 연락을 해오셔서 나눔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이미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서 온 거라 밥을 짓는 것에만 의미를 두어야 한다고 하셨다. 나눔해준다는 데 그게 어디야 싶어서 약속을 정해서 정말 잠깐의 찰나로 만나서 전해 받았다. 귀여운 사이즈의 전기밥솥. 아마 한국에선 단종되었을지도 모를 옛날식 모델의 전기밥솥이었다. 서너명의 교민들을 거쳐서 나한테 왔다는데 추측해보건데 아마 혼자 스웨덴에 공부하러 온 유학생의 시초가 아니였을까 싶다. 해외살이하시는 분들은 비행기 탈 때 전기밥솥을 직접 가지고 타서 공수해 오기도 하신다고 한다. 나도 그래볼까 생각은 했는데 막상 실천을 못했다. 이렇게 공짜 전기밥솥이 생기면서 냄비밥을 한동안 지을 필요가 없었다.

양이 적어서 한번 가득 밥을 하면 둘이서 3번 정도 먹으면 끝.

오래 코드를 꽂아두면 밥이 금방 마른다는 후기를 들어서 밥을 짓자마자 바로 한끼, 나머지 밥들은 잘 소분해서 냉동밥으로 얼려 두었다. 요즘 밥솥과는 다르게 밥짓는 시간도 거의 50분 가까이 소요되지만 중간중간 불조절이 필요없고 내가 쌀만 씻고 나가면 남편이 나없는 사이에 코드 꽂고 취사 버튼만 누르면 밥이 쉽게 된다는 장점이 있어서 우리는 유용하게 잘 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 전기밥솥을 사고 싶은 욕구도 같이 일고 있다!



가장 최근에 해먹은 콩나물밥.

어릴 때 가족들과 정말 자주 먹은 메뉴 중 하나이다.

스웨덴에도 콩나물이 있다. 한국의 콩나물과는 다르게 통통하고 짧다. 식감이 조금 더 아삭하고 시원한 맛은 덜하다. 살짝 풋내 비슷한 게 좀 더 강한 거 같기도 하다. 그래도 이 정도의 콩나물이라도 있는 것에 감사하다. 최근에 유럽 내에서도 아시아 음식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져서 그런지 일반 마트에서도 두부, 고추장, 간장 같은 걸 판다. 정말 고마운 현상이다.


스웨덴에서 사먹은 무가 항상 맛이 없었어서 무는 생략하고(콩나물밥에 무를 같이 채썰어서 올려서 만들면 진짜 맛있다!) 대신 당근을 채썰어서 같이 넣었다. 한국에서 공수한 귀한 말린 표고버섯도 같이 넣었다. 지난 번에 다진 소고기를 넣고 만들기도 했는데 고기 대신 버섯을 넣어도 식감이 좋고 맛도 좋았다.

뜸까지 잘 들인 밥을 잘 섞어서 고추장과 참기름을 같이 넣고 비벼 먹었다. 대부분의 콩나물밥 레시피를 보면 양념간장에 비벼 먹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어릴 때부터 고추장과 참기름의 조합을 좋아했다. 우리 집에선 엄마가 항상 고추장, 양념간장, 신김치를 쫑쫑 썰어서 알아서 비벼 먹을 수 있게 준비해주셨다. 그때마다 내가 선택한 조합은 고추장과 참기름. 

고추장과 참기름의 조합은 꼭 콩나물밥이 아니더라도 그냥 맨밥에 넣고 비벼도 맛있는 최강 조합인 거 같다. 한식 양념 중에 하나만 꼽으라면 난 고추장을 선택할만큼 고추장이 제일 좋다.


사진으로 남겨 두지 않은 여러 냄비밥의 후기들이 있는데 냄비밥을 해먹을수록 냄비밥만의 매력에 빠지게 되는 거 같다. 밥 할 때마다 설거지가 좀 귀찮고 만드는 과정에서 불조절이 조금 신경쓰이기도 하지만 한 번씩은 별미삼아 냄비밥을 찾아 먹고 있다.


한국에선 나는 밥보다 빵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빵이 지천에 깔린 이곳에선 오히려 밥을 찾아 먹게 된다. 빵이나 면으로 끼니를 때우다보면 어느샌가 밥을 지어서 먹게 되는 이상한 습관이 생겼다. 추우면 국물이 생각나고 속이 조금 느글거리고 좋지 않다 싶으면 살짝 얼큰한 국물이 땡긴다. 속이 안 좋을 때 라면이 더 생각나고 그렇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한국이 아니라 한국이 아닌 곳에서 찾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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