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토지》1부 1권

삶만큼 진실한 것은 없다

by Clare books


어떠한 역경을 겪더라도 생명은 아름다운 것이며 삶만큼 진실한 것은 없다.


한국 현대문학의 대작인 박경리 선생님 ‘토지’를 언젠가는 읽어보리라 했었고, 특히 그 서문의 강렬함을 인친님 피드에서 접해 마음에 담아두다가 ‘토지 1부 1권’ 2023년판을 손에 잡았다.

토지는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장장 26년에 걸쳐 집필되었고, 시대적 배경으로는 구한말 1897년부터 1945년 광복까지라고 한다. 5부작 총 20권이다.


서문을 읽고 또 읽었다.

1973년, 1994년, 2001년에 걸쳐 쓰인 선생님의 서문들.. 길지 않은 글들에 담긴 절절함이 나를 붙들었다. 그리고 그 문장들은 마음 깊숙이 와닿도록 아름답다.

위대한 문학작품은 작가의 창작물을 넘어, 이 세상 진실의 한 부분이 작가의 목소리를 빌어 우리 눈앞에 형상화된 것임을 느낀다.


'토지'를 완결하고 수년 후, 칠십 중반의 박경리 선생님이 소설의 배경인 하동 악양면 평사리 들판에 섰을 때, 별안간 그 땅으로부터 오랜 옛적부터의 사람들의 한과 슬픔이 아우성치며 그에게 달려드는 것을 느껴 목이 메고 눈시울이 뜨거워졌었다고 한다.

이 소설이 과연 나 박 아무개의 의도였을까..

아마도 누군가의 도구가 아니었을까 하며..

이 땅에 태어나 삶을 잇는 서러움, ‘토지’를 실감했다는 회고가 2003년판 서문에 실려 있다.

그는 작가라는 업을 도망칠 수 없는, 도저히 사슬을 끊을 수 없는 소명으로 표현했다. 목숨이 있는 이상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삶 그 자체만큼 진실된 것은 없다고.

어떠한 미물의 목숨이라도 살아남는다는 것은 아프며,

어떠한 역경을 겪더라도 생명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그러나 시간은 각일각 태어나고 죽어가며, 한없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지며, 세월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신기루와 같이 그 실체는 어디에도 없다고.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과 애잔함.

억조창생 모든 생명이 강물처럼 도도히 흘러와 충만한 엄청난 공간. 그리고 그 일사불란한 법칙..

작가가 그 실체를 활자로 가득 채운 책의 부피로, 작품으로 남기는 것은 가까스로 그 시간을 매달아 놓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소설의 시작은 1897년의 한가위, 꽹과리와 징 소리에 신명이 난 타작마당이다. 코흘리개도 장정들도 아낙네들도 노인들도 오늘 하루만은 배고프지 않은 날이다. 그러나 그 떠들썩한 축제에는 가난한 영혼들의 서러운 추억, 이별, 굶주리며 살다 죽어간 이들을 떠올리게 하는 쓸쓸함이 묻어 있다.


소설을 읽어가며,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인간의 여러 감정들-사랑, 질투, 슬픔, 서러움, 괴로움-이 이렇게도 진하게 응축되어 글로 표현될 수 있음에, 또한 내 마음을 찔러 아프게 할 수 있음에 놀랐다.

어찌할 수 없이 애끊는 사랑, 온몸을 뒤흔드는 질투, 아이 낳지 못하는 여인네의 슬픔, 천대받는 신분의 서러움, 엄마와 생이별한 아이의 발버둥, 과부의 눈물, 배고픔의 고통, 가난 속에 사회적 신분의 속박 속에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몸부림..

구한말 동학혁명의 실패, 단발령, 민비 시해, 일제의 국권 침탈로 기존의 질서가 요동치는 시대적 배경에서, 인물 하나하나의 모습과 그 감정이 생생히 살아 요동친다.


구천이. 한밤중 잠을 못 이루고 깊은 산으로 뛰쳐나가 내지르는 심장을 찢어내는 울음. 그 한 맺힌 통곡이 마음을 찌른다. 그를 괴롭힌 것은 아름답고 불쌍한 상전 여인에 대한 애틋한 사랑만은 아니었으리라. 그의 사지를 속박하는 신분사회에 대한 울분이었을 것이다.


풍신 좋은 용이. 그러나 가슴 깊이 묻어둔 응어리, 월선이에 대한 애끊는 사랑이 절절하다.

‘모두 내 죄다. 와 니는 원망이 없노..’

혼잣말처럼 계속 내뱉는 그 말에 가슴이 아프다. 사랑하지만 품을 수 없었던 여인이 멀리서라도 잘 살기만을 바랬었는데, 불행히 돌아온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를 붙들어 맨 사람으로서의 도리와 의무에, 어찌할 수 없는 괴로움에 허깨비가 되어버렸다.


월선이. 무당의 딸로 가장 천한 신분의 여인. 용이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사랑에 미친 짓인 줄 알지만 밤중에 그의 집 앞으로 달려간다.


강청댁. 잘난 용이를 지아비로 두었으나 그를 묶어둘 핏줄 하나 낳지 못한 서러움.. 세상 모든 여자를 다 요물로 보는 이글거리는 질투.. 그리고 돌아온 월선이의 머리끄댕이를 잡고 패대기를 치고도 속시원하지 않은 끝없는 미움에 사로잡혀 있다.


서희. 엄마가 종놈과 도망가 생이별하게 된 다섯 살 딸.. 엄마를 데려오라고 온 집안이 떠나가도록 패악질을 해보지만 소용이 없음을, 버림받은 슬픔을 깨달아간다.

흉년에 구걸하는 자식들 딸린 과부가 굶어 죽으며 손이 끊어지라고 저주할 정도로, 비정하고 덕없는 부잣집 최참판댁 최치수의 유일한 자식이다.


이들은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욱 어려워질 그 시대를 어떻게 살아낼까. 그 아픔과 슬픔을 견뎌내고 마침내 좋은 날을 맞이할 수 있을까. 이어질 그들의 삶이 궁금해진다.


박경리의 문장들


나는 표면상으로 소설을 썼다. 이 책은 소설 이외 아무것도 아니다. 한 인간이 하고많은 분노에 몸을 태우다가 스러지는 순간순간의 잔해다. 잿더미다. 독자는 이 소설에서 울부짖음도 통곡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소설일 따름, 허구일 뿐이라는 얘기다.

진실은 참으로 멀고 먼 곳에 있었으며 언어는 덧없는 허상이었을 뿐이라는 얘기다. 마찬가지로 진실은 내 심장 속 깊은 곳에 유폐되어 영원히 침묵한다는 얘기도 되겠다.

칠팔 년 전에 나는 어느 책에다 언어가 지닌 숙명적인 마성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진실이 머문 강물 저켠을 향해 한치도 헤어나갈 수 없는 허수아비의 언어, 그럼에도 언어에 사로잡혀 빠져날 수 없는 것은 그것만이 강을 건널 가능성을 지닌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전율 없이 그 말을 되풀이할 수가 없다.

- 토지 1부 서문 (1973년)


산다는 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애잔하다. 바람에 드러눕는 풀잎이며 눈 실린 나뭇가지에 홀로 앉아 우짖는 작은 새, 억조창생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과 애잔함이 충만된 이 엄청난 공간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일사불란한 법칙 앞에서 나는 비로소 털고 일어섰다. 찰나 같은 내 시간의 소중함을 느꼈던 것이다.

- 토지 완결판 서문 (1993년)


치열하게 살지 않는 목숨은 없다. 어떠한 미물의 목숨이라도 살아남는다는 것은 아프다. 끝없는 환란의 고개를 넘고 또 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어떠한 역경을 겪더라도 생명은 아름다운 것이며 삶만큼 진실한 것은 없다. 비극과 희극, 행과 불행, 죽음과 탄생, 만남과 이별, 아름다움과 추악한 것, 환희와 비애, 희망과 절망, 요행과 불운, 그러한 모든 모순을 수용하고 껴안으며 사는 삶은 아름답다.

그리고 삶 그 자체만큼 진실된 것도 없다.

문학은 그 모순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 토지를 쓰던 세월 (1994년), 2023년판 서문.


박경리 《토지》1부 1권, 다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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