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고래, 늙은 코끼리, 그리고 노란 개망초
2004년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이다. 읽은 이들이 그 ‘특별함’에 매료되어 계속 입소문을 내고 있어 계속해서 읽히는 작품이다.
세계 3대 문학상인 부커상 2023년 최종후보까지 오르며 '에너지에 휩쓸리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작품' 이라는 평을 받았다. 다만 계속 읽어내려가기 어렵게 느껴질만큼 이야기가 기이하고, 원색적이고 잔인한 부분이 많다. 나의 경우는 문학상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임에 궁금함이 있었고, 책을 선물하며 응원해 준 책친구 덕분에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을 일단 만난 분이라면, 여러 불편함이 있더라도 이 소설을 맨 마지막 장까지 꼭 읽기를 권한다!
산골 소녀 금복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다를 보았다. 갑자기 세상이 모두 끝나고 펼쳐진 아득한 고요에 곧 울음이 쏟아질 것처럼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리고 바다 한복판에서 불쑥 솟아올라 등에서 힘차게 물을 뿜어올리는 거대한 고래를 만난다.
희미한 달빛에 은가루를 뿌려 놓은 듯한 바다에서 파랗게 빛나는 고래를 향해 그녀는 헤엄쳐 간다. 그러나 아무리 가도 고래에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었다. 그녀는 푸른 고래에서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의 이미지를 보았고, 끝없이 거대함에 매료되었다.
그녀는 물을 뿜어올리는 거대한 고래 모양으로 자신의 큰 극장을 짓는다.
금복의 딸 춘희는 커다란 코끼리 등에 타고 하루 두 바퀴씩 마을을 돈다. 춘희는 외로운 벙어리이다. 그러나 늙은 코끼리 점보와는 둘만의 깊은 대화를 주고받는다.
긴 세월이 흐른 후, 춘희는 푸른 죄수복을 입고 맨발로 아흐레를 걷고 걸어, 폐허가 된 지 오랜 벽돌공장 터에 돌아온다.
나레이터가 갑자기 등장해 묻는다.
이 모든 이야기가 평대에서 국밥집을 하던 한 노파의 복수극일까? 과연 노파는 세상에 대한 복수에 성공한 걸까?
이 소설의 배경은 6.25 전쟁 이전인 1940년대로부터 1970년대말 박정희 시대까지 이어지는 듯한데, 읽다보면 등장 인물들과 사건들 모두 도저히 현실 세계의 이야기가 될 수 없음에 깜짝 놀라게 된다. 한 편의 긴 영화, 판타지 소설이랄까. 그런데 판타지 속 상상이라 거리를 두고 감상하기엔 인물들 삶의 아픔과 고난이 너무나 생생하고 잔인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그럴 즈음, 소설의 나레이터인 이야기꾼이 등장하여 사실 이것은 한낱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를 내가 전하는 것 뿐이다~ 라며 심각한 표정을 못 짓게 끼어들고, 그 시절 세태를 풍자와 해학으로 풀어놓아 피식 웃게 만든다. 괴이함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궁금함에 계속 책장을 끝까지 넘기도록 하는 독특한 소설이다.
태풍 로라가 휩쓸고 지나간 밤, 깡패들에게 털려 쫄딱 망하고 겨우 목숨만 건진 그 순간, 금복이는 하늘에서 엄청난 돈벼락을 맞는다!
그것이 노파의 저주의 서막이었음이 아이러니이다.
읽고 며칠이 지나니 현란했던 이야기 전개는 기억에 약간 흐려졌다.
그러나 소설 속 너무나 애틋하게 그려진 몇몇 장면들이 내 마음 깊이 계속 남는다.
궁금한 것이 많은 어린 춘희와 늙은 코끼리 점보가 말없이 정답게 나누는 대화..
의붓 아버지 문이 늙어 시력을 잃어갈 때 눈 앞에 펼쳐지는 또다른 세상..
춘희의 사랑, 노랑 원피스, 노랑 개망초. 그 사랑을 손으로 그려내며 끝없이 구워낸 붉은 벽돌이 만들어낸 장관..
노파의 무서운 저주, 세상에 대한 복수극은 성공한 것인가?
돈벼락으로 금복에게 성공의 절정까지 맛보게 한 후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려 파멸시켰고, 수백명을 불태워 죽이고, 춘희에게 십여년 간 죽음보다 더한 끔찍한 고통을 맛보게 했으니.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의 건축가의 눈물과 감격을 통해,
구운 벽돌에 그려진 춘희의 어린아이 같은 그림을 통해,
우리는 춘희가 노파의 무서운 저주에도 불구하고, 똑똑한 인간들의 사악함에 몸과 마음이 다 망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 같은 해맑은 사랑을 마지막까지 품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대 돌아오세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해가 지고 달이 뜨고
수많은 날들이 흘러도
나는 변함없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한 쌍의 족제비가 사랑을 나누듯
한 쌍의 잠자리가 사랑을 나누듯
우리 다시 만나
예전처럼 함께 사랑을 나누어요.
그대, 어서 돌아오세요.
나는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천명관 《고래》,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