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 《새의 선물》

삶이 내게 할 말이 있었기 때문에

by Clare books

은희경 작가의 1995년 첫 장편소설이자 제1회 문학동네 수상작이다. 27년이 지난 2022년 100쇄 기념 개정판으로 나온 초록초록 예쁜 책이다.


나는 일찍부터 삶의 이면을 보기 시작했다.
나는 삶을 너무 빨리 완성했다.
내가 생각하기로 나는 더 이상 성숙할 필요가 없었다.
어린애의 책무인 ‘성숙하는 일’을 이미 끝마쳐 버렸으므로 할 일이 없어진 나는 내게 남아 있는 어린애로서의 삶이 지루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귀여워 보이지만 조숙한 '열두 살 진희’의 말이다.

1969년 봄날, 어느 시골 마을, 진희의 집은 살림집 두 채와 대문 쪽 가겟집 네 칸 사람들이 하루 종일 마당 우물가에 북적대는 집이다.

진희는 어른들의 삶 이면의 비밀을 모두 파악하고 있고 하나씩 우리에게 폭로한다. 스물한 살 철없는 이모의 좌충우돌 연애사, 여자를 밝히는 최 선생님, 동네 꼬마들의 비밀 이야기.. 키득키득 웃으며 책장이 술술 넘어다. 그런데 웃다가 어느 순간 짠해진다.


진희에게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은,

버스터미널에서 낡은 포대기에 두 돌 아이를 업고 기저귀 가방을 들고 서 있는 테라아줌마의 모습이다.

막상 버스가 오면 한 발을 올리지 못하고, 버스가 떠나면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먼지가 피어오르는 버스정류장에 하염없이 서 있다. 매일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고 무시당하며 불쌍하게 살면서도.

진희는 테라아줌마가 남편과 아이를 버리고 떠나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용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은,

그 테라아줌마가 어느 날 진짜 가출하여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이 실성하여 울어대는 두 돌 아이를 진희가 지켜보면서..

엄마가 서너 살 어린 나를 마루 기둥에 묶어두고 집을 나가버린 그날, 내가 울었을까 아니면 울지 않았을까를 기억해 내려고 애쓰는 장면이다.

울고 있었다.. 엄마가 사라졌으니.

아니다. 울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크게 울었다면 내 울음소리를 듣고 엄마가 다시 되돌아와 가슴에 품어주었을 테니까. 울고 있는 아이라면 두고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진희는 여섯 살에 죽었다는 엄마 생각을 다시는 하지 않는다.

그러면 슬픔을 느끼게 되고 그런 슬픔은 약점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건드릴 때마다 아픔을 느끼는 상처를 가지면 내 삶에 대한 스스로의 조절 능력을 상실하는 거였다.

동정의 대상으로 관찰당하고 수모를 받음에서 자신을 보호하고자, 진희는 누가 쳐다보면 두 개의 나로 분리시킨다. 진짜 나는 내 안에 그대로 있고 ‘보여지는 나’에게 대신 내 역할을 하게 한다. 그러면 진짜 나인 ‘바라보는 나’가 상처를 덜 받는다고 말한다.


진희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인간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동정심, 선과 악, 불변, 오직 하나뿐이라는 말, 약속..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루지 못할지라도 삶이 내 안에 사랑을 만들었다면,

삶이 내게 할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이 내게 일어났을 것이라고 말한다.


읽으며 마음이 아리면서도 작가가 펼쳐내는 그 시절의 이야기가 아름답다.

철없는 사랑으로 아파하며 성숙해 가는 스물한 살 이모, 지켜보며 안타까워하는 외할머니, 이모가 가장 비참하고 힘든 순간 나타나 따뜻한 점퍼를 덮어주는 순정의 한 남자.


이 소설이 30년의 긴 세월에 100쇄가 넘도록 읽혀지고 사랑받는 이유는 아마도, 열두 살 아이의 눈으로 짚어내는 삶의 이면에 진실이 담겨 있어 우리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은희경 작가가 이 소설을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가 궁금하여 인터뷰들을 찾아보았다. 그녀가 서른여섯에 처음 신춘문예에 당선된 해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완성한 소설이었다.

서른여섯 해 자신의 답답하고 성실한 삶을 돌아보며,

나는 왜 태어났는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질문을 안고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 질문이 지금까지도 우리를 이 이야기 속으로 계속 손을 잡아 이끌고 있다.


은희경 《새의 선물》,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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