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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보현 Dec 06. 2021

「날개」(이상) - 질병에 대한 극복과 각성 의지

아스피린, 아달린, 커피의 상징을 중심으로

   1936년 『조광』에 발표된 이상의 「날개」 표지에는 이러한 삽화가 실려있다. 여기의 알약에서 우리는 작품 ‘날개’의 중심적 의미를 파악하려 해야 한다. 이 작품의 핵심 사상은 약으로 대표되는 질병과 그 극복의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날개」는 1930년대 근대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을 그려낸 소설로 해석된다.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주인공 ‘나’가 폐쇄된 방에서 나와 점차 경성 도시의 한 복판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곧 ‘나’가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체험하는 과정을 의미하게 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해석은 주인공 ‘나’가 폐쇄된 집을 나와 도시로 향하는 행동의 내면 심리를 설명하는 데 미흡함이 크다. 그렇지만, ‘나’가 질병으로 인해 겪는 고통 및 질병과 마주하여 나타내는 삶의 태도에 유의한다면, 소설 「날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날개」 속 주인공 ‘나’는 작가 이상을 대변하는 자전적 인물이다. 이상은 28세의 나이로 폐결핵으로 사망하기 직전에, 27세의 나이로 1936년에 「날개」를 발표한다. 그는 1933년에 23세의 나이로 폐결핵 진단을 받았는데, 이 당시 그는 몸이 약해져서 건축가로서의 사회 활동을 접고 병을 치료하면서 문학 활동에만 집중하기 시작한다. 이즈음부터의 이상의 투병 상황, 그로 인한 사회 활동 중단 상황이 「날개」 속 ‘나’의 상황에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날개」에서 “나는… 내 자라 온 스물여섯 해를 회고하여 보았다.”란 말에 근거할 때, ‘나’의 나이는 약 26세이다. ‘나’는 과거와 달리 현재 사회 활동이 중단된 상태이며 방에서 폐쇄된 생활을 하고 있다. “‘나’는 인간 사회가 스스러웠[고] 생활이 스스러웠다. 모두가 서먹서먹할 뿐이었다.” 또한 “직업이 없는 나”는 “외출할 필요가 생기지 않”는다고 서술된다. ‘나’가 이처럼 현재 사회 활동이 중단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건강 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 “‘나’는 안색이 여지없이 창백해가면서 말라 들어갔다. 나날이 눈에 보이듯이 기운이 줄어들었다. 영양 부족으로 하여 몸뚱이 곳곳의 뼈가 불쑥불쑥 내어 밀었다. 하룻밤 사이에도 수십 차를 돌쳐 눕지 않고서는 여기저기가 배겨서 나는 배겨낼 수가 없었다.” 이처럼 「날개」 속 ‘나’는 그 당시 나이의 이상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수준의 투병을 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에 사회 활동이 중단된 상태이다. 따라서 우리는 「날개」의 지금부터 진행되는 ‘나’의 행동의 동기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그가 작가 이상과 마찬가지로 (ㄱ) 중증의 투병 생활 중이며, (ㄴ) 사회 활동이 중단된 상태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나’는 이러한 투병 상황에서 병마에 순응하는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나’는 그 중증의 투병 상황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극명하게 표출한다. ‘나’는 아내가 준 약이 아달린이 아니기를 바라며, 그 약이 아스피린이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 아스피린은 질병을 극복하려는 생존 분투를, 아달린은 질병을 망각하려는 생존 포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스피린은 소염진통제인 반면, 아달린은 최면제이다. ‘나’가 투병 중인 중증의 질병이 이상의 경우와 같은 폐결핵이라고 보자. 그러면 소염진통제인 아스피린은 ‘나’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 그것은 ‘나’의 폐의 염증을 제거하는 작용 즉 소염 작용을 하여 그 병을 완화시킬 수 있다. 소염진통제는 항생제와 유사한 작용을 하기에 결핵균에 대한 항균 작용을 일으켜 ‘나’의 폐결핵을 치료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최면제인 아달린은 ‘나’가 병에 순응하여 포기할 수 있게 하는 약임을 의미한다. 질병을 치료하기보다는, 질병을 겪는 자신의 상황에 순응하고, 단순히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망각 상태에 있게 해주는 약이 바로 이 아달린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내가 준 약이 아달린이 아니라 아스피린이기를 바랐다. 이는 ‘나’가 자신의 투병 상황에 좌절해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질병을 치료하고 투병 상황을 극복하려 하는 인물임을 보여준다. 그는 병마와 마주한 상황에서 자신의 병을 이겨내고 삶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 인물이다.     


   더 나아가 ‘나’는 단순히 투병 생활을 극복하려는 것뿐만 아니라, 폐쇄적 투병 생활을 벗어나 사회 활동을 재개하려는 갈망을 보인다. ‘나’는 아내가 자신에게 먹인 약이 아달린인 것을 알고 난 이후, 도심으로 외출하면서 “경성역 일 이등 대합실 한곁 티이루룸” 즉 다방을 들려 커피를 마신다. 이렇게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는 행동은 2가지 측면에서 그의 사회 활동 재개에 대한 갈망을 암시한다. 우선, 그가 커피의 카페인 즉 각성제를 마시는 것은, 아내가 준 아달린 즉 최면제에 대한 저항을 상징한다. 그는 최면제를 복용하며 최면에 빠진 혼자로서의 삶을 살기보다는, 각성제를 복용하여 일어나 사회로 나아가려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가 사회적 만남의 장소인 다방을 향하는 것은, 사람들과의 교류와 사회 활동을 갈망하는 그의 내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날개」의 원형인 작가 이상의 경우를 보면, 이상은 폐결핵을 진단받았던 1933년에 서울 종로에서 ‘제비’란 이름의 다방을 개업한다. 그리고 이 다방에서 그는 이태준, 박태원, 김기림 등의 문인들과 교류한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실제로 이상은 질병 중에 홀로 은둔하는 폐쇄적인 일과를 보내기보다는, 사람들과의 활발한 교류와 사회 활동을 지속하기를 바랐음에 틀림없다. 마치 이 이상과 같이, 「날개」 속 '나’ 역시 병마와 싸우고 있지만 폐쇄적 삶에서 벗어나, 사람들과 교류하는 사회적 삶에 대한 의지를 암시적으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날개」의 핵심 주제는 ‘병마와 싸우는 가운데 그 질병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고 각성하려는 의지’에 있다. ‘나’는 투병 생활을 하고 있었던 작가 이상의 분신으로서, 투병으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 활동이 중단된 상태에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질병에 대해 아달린적으로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아스피린적으로 그것을 극복하려 한다. 또한 ‘나’는 카페인적으로 투병으로부터 각성하여 사회적 활동과 사람과의 교류를 재개하기를 갈망한다. 이는 작가 이상이 절망과 고립을 야기하는 폐질환에 직면한 가운데 그가 지향했던 투병 극복 의지를 보여주는 게 아니겠는가? 그는 분명 고통스러운 폐질환에 저항하려 했고, 질병으로부터 각성하여 사회인으로서 자신의 날개를 펼치고 싶어 했다. 이런 이유로, 「날개」가 발표되고 고작 1년이 지난 후 28세의 이상이 영원한 아달린의 잠에 빠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애처롭고 안타깝게 느껴진다.


   우리는 극한의 질병을 마주하게 될 때, 어떤 선택을 할까. 질병에 편히 순응하는 아달린적 선택으로 날개를 접을 것인가? 아니면, 투병에 저항하는 아스피린적인 선택과 사회와의 관계 맺기를 지속하기 위한 카페인적인 선택으로 날개를 펼치려 할 것인가?     



참고문헌

- 이상, 「날개」, 『조광』,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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