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먹은 공기처럼 무거운 여름 아침,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삼켜버린 듯한 정적 속에서 나는 걷는다. 더위는 단지 기온만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소리마저 눌러버리는 것 같다. 오늘도 그 무거운 침묵이 더위보다 더 무섭게 다가온다. 나는 소리를 찾아 산책길에 나섰다. 다행히 오늘은 매미 소리도 들리고, 여치 소리도 간간이 섞인다. 이 친구들도 더위를 즐기는 걸까. 나처럼 이 순간을 견디는 건지 즐기는 건지 모를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산 들레 길을 따라 걷는 길은 그나마 견딜 만하다. 숲이 주는 그늘과 나무 사이로 흐르는 미세한 바람만으로도 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게 자연의 소리 속에서 걷다 보면 생각은 어느새 점심으로 향한다. “오늘 점심은 뭘 먹지?” 생각 끝에 핸드폰 속 카드 한 장이 떠오른다. 급하면 마트에 가도 된다. 그런데 문득 냉장고에 어제 먹다 남은 녹두 닭죽이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나는 똑같은 음식을 연속으로 먹는 걸 싫어한다. 늘 삼시 세끼 주인공 탓을 했지만, 주방 권세를 가진 내 탓이 더 크다.
국물용 멸치와 디포리는 늘 넉넉히 준비되어 있다. 게다가 감자도 넘쳐나고 있다. 이렇게 재료가 정해지면 메뉴도 따라온다. 오늘 점심은 감자 수제비로 정했다. 본격적으로 준비에 들어가기 전, 막둥이 목욕부터 시켰다. 어젯밤, 막둥이는 계속 몸을 긁어달라며 내 손을 끌어당겼다. 쉬는 틈을 주지 않는다. 이건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상전도 이런 상전이 없다. 더운 날씨에 잠자리도 불편했는데, 결국 TV도 제대로 못 보고, 잠도 편히 못 자고 뒤척이며 보낸 밤이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막둥이는 목욕을 하고 개운한지 곤히 잠들어 있다.
수제비 준비는 이미 진행 중이었다. 멸치로 우려낸 국물은 진하게 준비되었고, 밀가루는 반죽해 냉장고에서 숙성 중이다. 호박이 있으면 더 좋겠지만 오늘은 감자만으로 승부를 건다. 마침 밀가루 양도 딱 2인분. 하지만 시중 기준 2인분과 나의 2인분은 양적으로 차이가 있으니 감자는 넉넉히 넣어야 한다.
며칠 전 어머니 댁에 들렀다가 빈 반찬통을 찾아오는데, 어머니는 빈 통이 미안하셨는지 안에 다시다를 담아 주셨다. 평소엔 조미료를 잘 안 쓰지만, 오늘은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져 작은 티스푼 하나 넣어보기로 했다. 국물을 한 입 떠보니, 문득 김혜자 선생님의 다시다 광고가 떠올랐다.
“아… 이 맛이야” 진짜 입에 착 붙는 맛이랄까. 그동안 잊고 있었던 감칠맛이 확 살아났다. 대기업의 힘이란 이런 걸까, 속으로 웃음이 났다.
그렇게 국물 맛을 정비하고, 마침 매운 음식을 잘 못 먹는 나지만 예전에 장로님께서 농사지어 주신 매운 고추가 떠올랐다. 평소엔 된장찌개에 한두 개만 넣었었는데, 오늘은 칼칼한 수제비를 위해 용기를 내어 넣어봤다. 고추를 넣자마자 매운 향이 확 올라왔다. ‘이거 너무 매운 거 아냐?’ 걱정도 잠시, 국물은 얼큰함을 넘어 속을 뻥 뚫어주는 칼칼함으로 가득 찼다. 이렇게 오늘의 점심은 여름날 어울리는 칼칼한 감자 수제비로 완성되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먹는 수제비 한 그릇. 먹고 나면 속은 따뜻하고 편안하다. 이열치열, 땀 흘려 따뜻한 음식을 먹는 것이 나만의 여름 피서법이다. 비록 에어컨 바람도 좋지만, 이렇게 제철 재료로 만든 집밥 한 끼에 담긴 위로와 따스함은 어떤 피서보다 든든하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더위 속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조용하지만 풍성한 하루를 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