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나를 위로하는 작은 식탁 앞에 앉았다. 내 손을 내려다보니 점점 엄마의 손을 닮아간다. 바쁘게 살아가느라 손에 물 마를 날이 없던 엄마의 손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발꿈치 또한 무게를 견디며 굳어져 있었고, 차가운 겨울이면 갈라져 피가 배어나기도 했다. 그 시절 나는 그 고통을 알지 못했다. 그저 바셀린을 덕지덕지 바르며 괜찮아지겠지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설거지를 하거나 매운 양념을 만질 때 그 작은 상처가 얼마나 쓰리고 아팠을지를. 결혼 후 나는 엄마와 달리 작은 상처조차 피하려 애썼다. 맨손으로 설거지를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언제나 고무장갑이 필수였다. 그런 내 모습이 곱게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알게 되었다. 억지로 식구가 돼라 하지 않아도 결국 시간은 누구나를 그 집의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다짐했다. 내 며느리들에게는 강요하지 않겠다고. 억지로 이 자리에 뿌리내리게 하지 않겠다고.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뿌리를 내리고 둥지의 주인이 될 테니까. 그래서 가끔 맨손으로 설거지통에 손을 담그려는 며느리를 보면 말린다. 아직은 이른 듯하다. 그 곱고 예쁜 손이 오래도록 그대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명절이 되면 나는 늘 네일을 했다. 남들이 휴가철에 멋을 내기 위해 네일을 할 때, 나에게 그것은 명절 준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연약한 손톱을 보호하는 마지막 방패였던 셈이다. 장을 보고 하루 종일 음식을 하고 열네 명이 넘는 식구의 밥상을 준비하다 보면 손톱은 금세 갈라지고 입술은 터졌다. 그것이 명절의 흔적이자 훈장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거리 두기로 모임이 사라졌던 2년, 그 시간이 내게는 마치 천국 같았다. 하지만 다시 압박감은 다가오고 있다. 그래도 두렵지 않다. 함께하시는 분이 주시는 지혜를 믿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나는 예전에 자주 만들던 토스트를 꺼내 들었다. 집집마다 하나씩 있던 토스트기가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오븐이나 에어프라이어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어서 따로 둘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바게트로 만들 수도 있지만 씹기 편한 식빵이 더 잘 어울린다. 이제는 딱딱한 음식조차 조금은 버겁게 느껴지니 말이다. 반으로 자른 식빵 위에 마요네즈를 두 바퀴 돌려 바르고 옥수수 통조림 두 큰 술을 올린 뒤 체다치즈 한 장을 반으로 잘라 덮는다. 예열된 오븐이나 에어프라이어에 3~5분만 돌리면 끝이다. 노릇하게 녹아내린 치즈와 옥수수의 달큼함이 어우러져 담백한 맛을 내고 따뜻한 커피 한 잔과 곁들이면 그 자체로 작은 위로가 된다. 오늘도 손끝은 여전히 분주하지만 그 속에 담긴 마음은 달라졌다. 억지로 끼워 넣지 않아도, 애써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다. 세월은 결국 우리를 서로의 사람이 되게 하니까. 오늘 아침, 작은 토스트 한 조각 위에 나는 위로와 다짐을 올려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