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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 May 27. 2020

오곡찰밥에 김 한 장

엄마 그리고 엄마의 엄마


네모 반듯한 밀폐용기 뚜껑을 열면 새까만 전장김 한 장이 쭈굴쭈굴 어딘가에 붙어있다. 나무 주걱으로 티라미수 떠내듯 귀퉁이부터 작게 조각내어 그릇에 담아내면 김 아래로 오곡 가득한 찰밥이 모습을 드러낸다. 밥을 지을 때부터 간을 하는 데다 김에 붙어있는 소금까지 더해져 반찬이 필요 없는 찰밥. 다양한 크기, 식감의 오곡들을 입안 가득 넣고 음미하다 보면 심심한 듯 짭짤하고 밋밋하면서도 재밌는 느낌이었다.


처음 김 붙은 오곡찰밥을 접한 건 외할머니로부터였다. 가져오신 밀폐용기 가득 오곡찰밥이 들어있었고 그걸 전해받은 엄마는 냉동실에 넣으면 이 맛이 사라진다며 부엌 식탁에 두고 며칠 내리 찰밥만 먹었다. 어릴 적 편식이 꽤 심했던 나도 겉에 붙어있던 짭짤한 김 덕분에 불평하지 않고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타지로 시집보낸 딸을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마음에 준비한 특식 같은 메뉴였을까, 정월 대보름날에나 먹을법한 메뉴를 꽤 자주 해주셨다.




외할머니는 약속을 주로 새벽녘 갑작스러운 전화로 잡곤 하셨다. 아니 약속이라기보다는 통보에 가까웠다. 굳이 통화내용을 듣지 않아도, 전화를 끊자마자 부랴부랴 집을 정리하고 시외버스터미널로 마중 나가는 엄마를 보면 짐작 가능했다. 그리고 맞이한 외할머니의 양손엔 늘 출처를 알 수 없는 체크무늬 쇼핑백 한 가득 부산어묵과 오곡찰밥이 들어 있었다. 뭘 이런 걸 무겁게 자꾸 해오냐며 타박하는 엄마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애기들이 좋아하는 거 가져왔는데 뭘 그러냐며 뾰로통한 표정을 한번 짓고는 금세 개구진 표정으로 씨익 웃으셨다.


그렇게 가져오신 오곡찰밥을 난 늘 두 그릇씩 먹었던 것 같다. 한 그릇 가득 배 부르게 먹고도 많이 해왔다며 더 떠다 주시는 걸 거절하지 못했다. 위암 수술을 받아 양껏 먹을 수 없는 엄마를 대신해 보란 듯이 눈앞에 있는 음식들을 배가 터질 때까지 싹쓸이했다. 조금이라도 더 먹이고 싶은 외할머니의 마음과 해주신 음식을 싹싹 긁어먹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엄마의 마음이 이상하리 마치 시리게 전해졌고, 나라도 잘 먹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배부르면 그만 먹으라는 엄마와 잘 먹는데 왜 그러냐는 외할머니 사이에서 입안 가득 밥을 물고 우물우물하며 그냥 웃었다.


늘 그렇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오실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대학 졸업 후 정신없이 회사를 다니다 오랜만에 뵌 외할머니는 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늘 모든 걸 안다는 듯 웃고 계셨던 얼굴에는 불안과 초조함이 묻어 있었고, 그런 외할머니를 대하는 엄마를 통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해졌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무관심했던가...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지? 마음 한켠이 아렸다.


외할머니는 가장 행복했던 때로 시간여행을 자주 떠나시는 듯했고, 그때가 언제인지는 대화 몇 마디면 알 수 있었다. 


"친구들하고 책보 싸매고 출발해서 쩌어기 저 바다 가까이까정 엄-청 멀리 걸어 다녔는데도 하나도 안 힘들었어. 걷는 거 하나는 아직도 참 잘해- 오늘 아침에도 송도 한 바퀴 돌고 왔거덩?"  


"느이 엄마 영희가 어릴 때 얼-마나 공부를 잘했는지 니 아나? 그 당시 장관상이면 말 다 했제. 얼-마나 똑똑했다고."


만날 때마다 늘 해주시는 얘기였다. 친구들과 동네 이곳저곳 누비고 다니던 골목대장 소녀 때와 자식들 커가는 모습에 마냥 행복했던 시절. 들을 때마다 처음 듣는 척, 놀라는 척 맞장구치다 보면 어느샌가 수다 떨 친구를 만난 것마냥 눈빛이 반짝반짝해지시곤 하셨다.




그렇게 1년, 2년 김 붙인 오곡찰밥은 잊혀져가고 있었다. 나에게 그것은 외할머니만의 전매특허 메뉴였기에 다른 사람이 해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할 수 없었다. 타지 생활을 하다 문뜩 떠오르는 날이 있어도 그게 다였다. 그러다 얼마 전 외할머니를 오랜만에 뵈러 가는 날 아침, 그때 그 오곡찰밥을 다시 봤다. 김이 붙어있던 외할머니표 오곡찰밥과는 조금 다른 모양새였지만 분명 옛날 그 맛과 비슷했다.


"엄마, 엄마 꺼엔 김이 없는데 외할머니가 해주신 거엔 왜 늘 김이 있었지?" 

지역만의 독특한 레시피 같은 거 아닐까 하는 마음에 가볍게 물었는데, 


"밥 마르지 말라고 그냥 붙이셨다 했는데... 별 이유 없을걸?" 

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충격이었다. 김까지 같이 떠먹었을 때 조화롭게 어우러지던 그 맛이 철저하게 계산된 한 수가 아니었다니. 김이 아니더라도 밀폐용기에 담으면 마르지 않을 텐데... 김을 왜... 마음이 시큰했다. 밀폐용기의 기능을 누군가 알려줬더라도 외할머니에겐 익숙지 않은 물건이었겠지. 딸에게 갓 지은 것 같이 찰기 가득한 밥을 먹이고픈 마음을 김 한 장에 가득 불어넣었을 외할머니 모습이 아른하게 그려졌다.



엄마가 오곡찰밥을 지은 그 봄날, 

한국엔 코로나 바이러스가 무섭게 유행하고 있었다. 식당에서 밥을 먹는 소소한 일상마저 여의치 않게 되자 외할머니를 모시고 야외에서 돗자리라도 깔아볼 심산으로 새벽부터 불고기, 가지 조림, 잡채, 봄나물을 준비해 바리바리 도시락통에 담아 집을 나섰다. 1시간가량 운전해 조용한 해변가에 도착했고, 모래사장 한 구석 돗자리를 펴고 준비한 음식들을 펼치자 외할머니는 연신 박수를 치며 좋아하셨다. 먹는 내내 "와줘서 고맙다. 맛있다. 이걸 어떻게 다 준비해왔냐. 영희 덕분에 호강하네."를 반복하셨다. 다른 건 조금씩 잊어가시는 것 같은데 '먼 길 나 보러 와주는 고마운 내 딸, 착한 내 딸 영희'는 잊혀지지 않으시는 것 같았다. 


이렇게 오곡찰밥은 시집가버린 그리운 딸을 위한 특식에서 아픈 엄마를 위한 건강식으로 변해있었다. 김도 붙어있지 않고 맛도 조금 달랐지만 재료들을 불리고 삶고, 밥을 안치고 뜸을 들이는 그 시간 동안 서로를 생각한 마음은 같았겠지. 커다란 쇼핑백에서 갖가지 음식을 꺼내어 돗자리에 펼치는 엄마의 모습에서 어릴 적 시외버스터미널에 양손 가득 찰밥을 들고 서계시던 외할머니 모습이 겹쳐 보였다.


"느이 엄마 올해 몇 살 묵었냐? 흰머리가 많이 났네. 어이구." 

딸의 머리가 하얗게 샌 걸 보고 손녀에게 딸의 나이를 몰래 물어보는 외할머니만큼이나 총알같이 지나가버린 세월에 놀랐다. 그럼에도 시간은 우직하니 제 갈길 가리란 걸 알고 있어 아쉽고, 야속한 마음이다. 


어느 날, 내 차례가 왔을 때 난 엄마에게 무얼 해 드려야 할까?



엄마와 엄마의 엄마. 마스크 없이 돌아다닐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2020.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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