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사는 것이 아닌, 살아냈던 시간들 3

영주권 없이 살아가는 이민자의 삶이란

by hyun


누군가 올린 글을 본 적이 있다.
호주에 사는 한국인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고.
영주권이 있는 사람들과,
영주권을 따려고 하는 사람들.

브리즈번의 첫 석양

나도 후자였다.
2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호주에서 학교를 다녔다.

지금은 뉴질랜드에서
석사 과정을 위한 영어 과정을 하고 있다.
후회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첫 시작을 뉴질랜드에서 했다면
내가 원하는 곳에 더 빨리 닿지 않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 때가 있다.

나는 호주에서
영주권을 따기 위해
발버둥 치던 사람 중 하나였다.

사실 한국에서
아이들의 유학을 계획했을 때,
가족이 다 함께 움직이기 위해
우리 부부는
둘 중 한 명이 학업을 하는 방향으로 정했고,
남편이 원하지 않아
그 역할은 자연스럽게 내 몫이 되었다.

영어에 자신이 없었던 나는
비교적 학비가 저렴하고,
당시 ‘비자 학교’라 불리던
비즈니스 서티 과정을 알아봤다.
길게는 4~5년까지
비자가 나오는 과정이라
아이들 학비 할인까지 생각하면
꽤 괜찮은 옵션이었다.

다만,
배우자까지 전부 동반 비자로 묶기에는
리스크가 컸고,
혹시라도 거주 중
영주권을 목표로 하게 될 경우를 대비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부족 직업군 중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분야를 찾게 되었고,
남은 선택지는
요리 계통뿐이었다.

내가 요리로 갔더라면
어쩌면 뉴질랜드에 오지 않고
호주에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파티셰 과정을 선택했고,
경력이 없는 상태에서
취업 비자로 전환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호주가 내가 학업 중이던 시기에
졸업 비자 연령을
50세 이하에서 35세로
갑작스럽게 낮추고
바로 적용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내 계획은 전부 물거품이 되었다.

고민 끝에
나는 뉴질랜드로 오게 되었다.
이주를 결정한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은
금액적인 문제였다.

내 학교 생활도 쉽지 않았지만,
아이들 학교 생활도
참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나름 아쉬운 것 없이 살았던 것 같다.
바닥부터 시작해
이 나이에 이 정도를 일궈냈다면
나름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먹고사는 데 큰 걱정은 없었고,
외제차도 타고 다녔고,
아이들에게 좋은 것 먹이고 입힐 만큼은
여유가 있었다.

계속 일을 하다
코로나가 터지면서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게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
일하지 않는 내가
너무 쓸모없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냥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건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호주에 와서
학교를 시작하자마자
집 앞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을 시작했다.
주 3일은 학교에
풀타임으로 다니고,
주 3~4일은
카페에서 일을 했다.

주 5일,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들 도시락 두 개를 싸고,
저녁에는
가족을 위해 밥을 했다.

2년 전이지만,
카페 오픈을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나
새벽 이슬을 맞으며
20분 거리의 카페까지
사과 하나를 먹으며
걸어가던 그 장면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한국에서 커피숍 일을 하고 싶어
바리스타 1급,
라테 아트 자격증까지
모두 따서 갔지만,
호주 현지 경력이 없는
서른여덟 살,
아이 둘 엄마 바리스타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급으로라도 일해서
경력을 쌓겠다는 마음으로
버텼다.

학교와 일을 병행하던 시기,
하루 종일
무시당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와
엉엉 운 날도 있었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이러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을 때도 많았다.

한국에 있는
아픈 가족까지 신경 써야 했고,
남편의 눈치도 봐야 했다.
내 2년은
말 그대로
생지옥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 인생 전체를 통틀어
그 2년이
가장 힘든 시기였다.
몸도, 마음도
모두 지쳐 있었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철저하게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지고
견뎌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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