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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아 Sep 03. 2024

그 여자네 집, 내 엄마의 양육방식

마침내 살아남은 내가 쓰는 글

나는 오빠와 다르게 독특한 방식으로 길러졌다. 어릴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너는 성격이 못 되어먹었으니 공부라도 잘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여자로 태어났으니 더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냉정한 사회에서는 똑같은 능력의 여자와 남자가 있으면 남자를 뽑는다고도 했다. 어린아이가 그 말을 어디까지 이해했을까?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귀에 딱지가 앉히도록 들었던 그 말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생생하기만 하다.



 중간고사든 기말고사든 시험을 보면 칭찬을 받는 법이 없었다. 100점 만점에 한 과목이라도 90점 미만으로 떨어지면 굵은 나무막대기로 40대씩 손바닥을 맞았다. 수학 경시대회에 나가서 은상을 받으면 금상을 받지 못했다고 타박을 들었고, 95점 맞은 시험지를 보여주면 100점이 아니라고 혼이 났다. 엄마는 내 눈높이보다, 내 키보다 항상 높은 곳을 바라보며 윽박지르고 나를 몰아세웠다. 아무리 채우고 채워도 밑동이 이미 깨져서 물이 새는 항아리를 채우는 기분이었다. 엄마는 내가 다른 사람들을 밟고 올라가 주목받으며 똑 부러지게 자라나길 원했다. 그렇지만 나는 천재도 영재도 아닌 그냥 평범한 아이였다.



아무튼 나는 생존교육을 받듯 자라났다. 혼자서도 알아서 일어나 지각하지 않게 알람시계를 맞추고, 비가 와도 데리러 올 부모님이 없으니 날씨를 보고 알아서 우산을 챙기고, 스스로 밥을 꺼내먹고 설거지를 할 수 있도록, 그리고 모자란 오빠에게도 밥을 챙겨주고 치우며 뒤치다꺼리를 하도록 말이다.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일들이 늘어날수록 반대로 오빠는 응석받이로 아무것도 혼자서는 못하는 백치로 자라났다.



아침마다 엄마는 잠이 덜 깬 눈으로 등교를 준비하는 오빠를 종종걸음으로 따라다녔다. 준비물은 챙겼니? 숙제는 했어? 밥 조금만 먹고 가. 한 입만 더 먹자. 무슨 일 있음 연락해 등등. 오빠가 여엇한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도 항상 물가에 내놓은 아기 취급이었다. 오빠는 그 대접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았으며 엄마가 다정할수록 엄마를 더 냉대했다. 짜증 내며 현관문을 닫고 나가버리는 오빠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엄마는 다시 안방에 들어가 잠을 잤다. 너는 알아서 가. 그녀가 내게 해 준 말은 그거 하나뿐이었다. 엄마는 오빠에게 받은 분노를 내게 차갑게 풀었다. 렇다고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방이 달랐을 뿐.



나는 비싼 학원에 보내졌고 방 하나를 빼곡히 채운 어려운 책들을 선물 받았다. 엄마가 판단한 전형적인 딸들이 좋아할 법한 색색의 분홍 레이스 커튼과 순백처럼 하얀 옷장과 책상들 사이에서 나는 잠을 잤다. 가끔 놀러 온 친구들은 내 방이 공주방이라며 부러워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집에서 진짜 공주님은 아니었다. 나는 분홍색이 싫었다. 공주풍의 가구도, 알록달록 분홍색인 이불도 커튼도 내 취향은 아니었다. 엄마는 내 것을 살 때 단 한 번도 내 의견을 물어본 적이 없다. 나는 분홍색이 좋다고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그건 엄마 취향이자 엄마가 원하는 딸의 모습이었다. 어쩌면 그건 그녀가 그녀의 엄마, 그러니까 할머니에게 받고 싶었던 방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의 일부를 닮은 자식이지만 엄마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엄마의 틀에 억지로 나라는 존재를 끼워 맞추듯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20년이 넘게 걸렸다.



엄마는 본인의 양육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는 너무도 바쁜 삶을 살았다. 비틀린 양육방식으로 인해 내 마음이 울퉁불퉁 모나고 금이 가 있다는 것을, 그 틈사이로 외로움이 들어찬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없었다.



아빠는 지방에서 일을 하며 한 달에 한번 집에 올까 말까 한 사람이었고, 그마저도 집에 오는 1박 2일간은 죽은 듯 잠만 자고 밥만 먹다 가곤 했다. 아빠는 하나뿐인 딸이 몇 살인지, 몇 학년 몇 반인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생일이 언제인지도 모르는 무심한 사람이었다. 엄마는 아이 둘 육아와 모든 잡다한 집안일 그리고 경제활동까지 해내야 했기에 천천히 걸어본 적이 없었다. 항상 종종걸음으로 걸어 다녔고 반쯤은 뛰어다녔다. 그녀는 모든 시간을 쪼개 살았다.



꾸벅꾸벅 잠을 이겨내고 늦은 시간 퇴근한 엄마를 기다려 대화하고 싶었던 어린아이는 엄마에게 말을 걸면 타박을 받았다. 지겨워 죽겠어. 내가 하루종일 밖에서 시달리고 왔는데 집에서까지 시달려야 하니? 또 네 말까지 들어줘야 해? 지긋지긋해. 제발 조용히 해. 화날 때마다 웃으며 말하는 습관이 있던 엄마는 웃으며 화를 냈다. 더 화가 많이 날 때마다 그녀는 밝게 웃었다. 오랜 직장생활을 견디며 생긴 그녀만의 생존방식이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행복해서 웃는 건지, 화가 나서 웃는 건지 항상 헷갈렸다. 오늘은 엄마 기분이 어떨지 관찰했다. 그녀는 내가 살면서 이해하기 위해 죽을 듯이 노력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혼자 학교를 가고 집에 돌아오면 고요한 집이 나를 반겼고, 반만 깨끗한 거실에 구석에 던져진 먼지 묻은 걸레가 보였다. 미처 다 닦지 못하고 반만 닦다가 급히 출근하느라 깜빡하고 정신없이 놔뒹굴어져버린 걸레. 나는 바닥을 닦고 그 걸레를 주워다 빨면서 정신없이 청소하다 출근시간이 맞물려 뛰쳐나갔을 엄마의 뒷모습을 상상했다.



만약 그녀가 살던 시대에 자동 청소 로봇이 있었다면, 식기세척기가 있었다면, 건조기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무릎을 꿇고 바닥을 닦지 않아도 되어서 엄마는 허리가 좀 덜 아팠을지도 모르겠다.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털어 너는 시간이 줄어들어서 하루에 30분은 더 잠을 잘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피처폰이 아닌 스마트폰이 더 빨리 출시되었다면, 그래서 처리해야 하는 볼일들을 일일이 방문하지 않고도 어플 하나로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면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항상 뛰어다니지 않아도 됐었을까.



그럼 나는 학대받지 않았을까? 그녀가 내 말을 한 번이라도 더 들어줬을까. 혹은 그녀가 암에 걸리지 않고 좀 더 오래 살았을까? 그럼 내 결혼식에 왔었을까? 내 아이의 얼굴을 볼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우리 사이의 간극은 조금 좁아졌을까 하는 바보 같은 상상을 하곤 한다.



자동 청소 로봇이 없고 식기세척기도 없고 건조기도, 스마트폰도 없는 세상에서 그녀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김치찌개를 끓여놓고 가곤 했다. 하교하고 아무리 빨리 집에 와도 엄마는 항상 집에 없었지만 뚝배기 냄비 안의 김치찌개의 열기에서 나는 엄마가 이 집에 머물러있었음을 느꼈다. 엄마가 숟가락으로 아무렇게나 퍼서 넣은 김치찌개 안의 스팸 조각들을 나는 사랑이라 믿었다.



그녀는 나를 낳은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지만 나를 사랑했다. 사랑했으나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만의 비틀린 방식으로 변질된 사랑은 고통으로 소화해야 하는 감정들이었다. 엄마는 내가 이해하기 위해 평생을 걸쳐 노력했던 유일한 사람이었고 마침내 이해했기에 너무나 고통스러운 사람이었다. 엄마의 사랑은 너무 커서, 내게는 너무 고통스러웠던 사랑이었다.



엄마, 나는 그래서 엄마를 기억하고 싶었다. 기록하고 싶었다. 엄마가 건넜던 그 모든 길을 다시 회고하면서 그녀가 잘못 선택했던 모든 선택지들을 나는 내 아이와 다르게 가야 하기 때문이다. 엄마와 내가 걸었던 최악의 길들을 피해 건강한 사랑의 범주 안으로 내 아이를 이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 아이를 절벽으로 낭떠러지로 밀어내는 육아방식을 나는 답습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게 남겨진 마지막 숙제이자 평생의 과업처럼 느껴진다.



왜냐면 이제와 엄마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기 때문이다. 사실은 나를 낳은 것을 후회한다고 했지만 실은 엄마 스스로가 살기 싫었다는 감정이 어린 나에게 쏟아졌던 것을 이제는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건 폭력적이고 무자비했던 엄마의 폭언들을 몇백 번 몇천 번을 곱씹으며,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 피나게 노력한 결과다. 나는 끝끝내 살아남아 것이 엄마의 생존방식이었으며 그녀가 습득한 양육방식었다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엄마가 내게 알려준 건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지름길이 아니었다. 모나고 울퉁불퉁 자갈과 뾰족한 가시밭길이었고 때로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길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 정상까지 왔다. 엄마가 알려준 양육의 방식은 내게 지울 수 없는 평생의 상처를 남겼지만 그 덕에 남들보다 강한 정신력으로 어떤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덕에 나는 누구보다 강한 엄마가 되었다. 인생에 어떤 고난이 닥쳐도 나는 침착하고 덤덤하게 위기를 대응하며 가정을 지키는 사람이 되었다.



누구보다 마음만은 강한 사람이 되었지만, 아직도 좋은 엄마가 되는 방법은 잘 모르겠다. 그래서 틈틈이 육아서적을 사서 읽고, 아이가 잠든 밤 아이의 돌발행동에 대해 유튜브나 인터넷에 검색해서 찾아보고 내 아이 기질에 어떤 방식이 적합할지를 고민한다. 아이가 혼란을 느끼지 않도록 남편과 육아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눈다. 끝없이 노력하지만, 그래도 내가 좋은 엄마인지 나는 자신이 없다. 내가 아이와 함께 걷고 있는 이 길은 우리 엄마와 갔던 길이 아니다. 나도, 우리 아이도 이 모든 길이 처음이다.



그래도 내 아이의 손을 잡고 산 정상까지 걸어볼 것이다. 길을 걷다 큰 구덩이가 나온다면 손을 잡고 구덩이를 건너뛸 수 있게 용기를 북돋아 줄 것이다. 가시밭길이 나온다면 아이를 안고 내가 그 길을 건널 것이다. 먹을 게 다 떨어지면 어떻게 물고기를 잡고 열매를 따는지 스스로 습득한 방법도 알려줄 것이다. 강을 건널 때는 물에 휩쓸리지 않게 수영하는 법도 알려줄 것이다. 나는 가 본 적이 없어서 꽃길도 지름길도 모른다. 헤멜 수도 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갈 것이다.




부디 나는 그녀의 흔적을 답습하지 않기를, 온전히 내 아이를 비틀린 마음 없이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내 아이는 훗날 엄마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씁쓸함이 아닌 따스함이 가슴 한편에 맴돌기를 소망한다. 아이의 무조건적인 믿음과 사랑이 내 마음속 어린아이를 치유했듯 나는 다정한 사랑이 험난한 세상을 이겨낼 수 있는 가장 강한 무기라고 믿는다. 나는 내 아이에게 약육강식 대신 사랑으로 생존하는 방법을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나를 절벽으로 밀었던 내 엄마에게 손을 내밀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엄마, 당신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용서합니다. 그래도 엄마 덕분에 나는 누구보다 꿋꿋하게 살아남아 강한 어른이 되었어요. 당신을 이해하고 사랑하지만 당신처럼은 살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방식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이와 저만의 방식으로 이 길을 걸어갈 겁니다. 이 아이가 건강한 어른이 되어 독립하는 그날까지 건강한 모습으로 내 아이 옆을 지킬 겁니다. 그리고 아이가 내 품을 떠나는 날, 나는 끝끝내 당신과 이별할 겁니다. 엄마, 당신을 꼭 이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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