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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아 Aug 27. 2024

내 엄마는 어쩌다 암환자가 되었나

오직 나만 기억하는, 잊힌 내 엄마의 역사

아주 옛날,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엄마는 경제활동 인구의 일원이었다. 백화점에서 일을 하던 엄마는 나를 낳고 나서 '선물의 집'이라는 여러 소품들을 판매하는 가게를 운영했다. 3층 짜리 작은 복합빌라 1층은 선물의 집 간판이 어엿하게 달려 있었고 2층은 우리 집. 그리고 3층은 이 건물의 주인인 늙은 부부와 앉은뱅이 딸이 살았다.


당시 육아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으므로 엄마는 네 살 터울인 나와 오빠를 2층 집에 두고 꼭꼭 문을 걸어잠갔다. 그리고 두어 시간에 한 번씩 후다닥 걸어 올라와 참았던 소변을 누면서 우리가 잘 놀고 있는지 데룩데룩 눈을 굴리며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선물의 집엔 이름에 걸맞게 다양한 인테리어 소품들을 판매했다. 부귀영화를 불러일으킨다는 코끼리 동상부터, 청동으로 만들어 무겁고 웅장한 독수리 새 모형, 작고 아기자기한 반지나 목걸이 같은 액세서리까지. 화이트데이나 밸런타인데이가 되면 엄마는 며칠 전 새벽부터 밤을 새우며 시장에서 떼온 알록달록 포장지들로 사탕을, 초콜릿을 직접 포장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린 시절 내가 새벽에 목이 마르거나 화장실이 마려워 거실로 나오면 항상 불이 켜져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색색의 포장지와 투명 테이프와 리본 그리고 물건 속에서 그녀는 둘러싸여 있었다. 항상 그녀의 손은 부르트고 건조했으며 갈라지고 투박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바쁘면서도 삼 시 세끼 나와 오빠에게 밥 먹이는 걸 잊지 않았으며, 매일 뛰어놀아 꼬질꼬질한 나를 때밀이로 빡빡 문지르며 씻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로봇 청소기도, 건조기도, 식기 세척기도 상상 못 할 세상에서 그녀는 악착스럽게 그리고 우악스럽게 집안일과 육아와 가게운영을 해나갔다. '선물의 집'은 항상 장사가 잘 되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잘 되는 달에는 하루에 백만 원이 넘는 돈을 손에 쥐기도 했다. 어느 날 밤엔 아빠가 날렵한 검은 승용차를 끌고 와서 우리를 태우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엄마가 매일 새벽 우리를 재우고 물건을 떼러 남대문을 다니고, 기념일마다 두 손이 부르트도록 포장지에 선물들을 싸고 나서 차곡차곡 모은 돈과 맞바꾼 하나의 성공의 산물이었다. 새카맣게 번쩍번쩍 빛나는 검은 승용차는 어린 내 눈에도 빛나보였다.



엄마는 '선물의 집'을 운영했지만 정작 본인에겐 어떤 성공의 선물도 선사하지 않았다. 번쩍번쩍 광이 나는 검은 승용차는 아빠가 타고 다녔고 엄마는 열심히 번 돈으로 나와 오빠에게 항상 예쁘고 멋진 옷을 사 입혔다. 미키마우스와 미니마우스가 그려진 알록달록 예쁜 새 옷들. 나는 항상 그런 원피스를 입고 그녀 가게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 후에 우리는 돈을 더 많이 모아서 월세살이 빌라에서 어엿한 아파트를 얻었다. 그녀의 피와 땀이 모인 결과였다.



그녀의 엄마, 그러니까 외할머니는 지성인이었다. 미군을 상대로 장사하던 외할머니는 영어에 아주 능통했다고 했다. 영어를 할 줄 알고 눈이 트인 만큼 많이 남달랐던 분이라고 했다. 그래서 불의를 참지 않고 본인의 행복을 위한 선택을 했다. 당시 일곱 살이던 엄마와 줄줄이 딸린 삼촌 둘을 두고 외할머니여성편력이 심한 외할아버지와 이혼을 했다. 당시엔 엄두도 못 낼 이혼 도장을 과감히 찍고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했다. 겨우 일곱 살이었던 아이, 내 엄마는 자신의 세상과 생이별을 겪었다. 홀로 미국으로 건너간 외할머니는 거기서 이름 모를 한 날 한시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했다. 외할머니가 이혼을 하고 미국으로 가서 행복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외할머니 이름도 모르며 사진도 본 적이 없다.



그 뒤로 외할아버지는 수많은 계모를 데려왔다. 조건은 단 하나, 계모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외할아버지 돈을 보고 따라온 계모들은 할아버지가 만만찮다는 것을 알고 일이 년을 버티다 내뺐다. 새로운 계모들은 엄마와 삼촌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괴롭혔다. 공부를 하지 못하게 책을 물에 빠트리기도 하고, 할아버지와 형제들을 이간질을 시키기도 했다. 영리한 엄마 대신 두 어린 남동생들을 꼬집거나 티 나지 않게 집요하게 괴롭혔다. 멍이 들지 않게 이불을 덮어씌우고 빗자루로 때렸다고도 했다. 그래서 엄마는 할아버지가 주는 용돈을 모아 꼬박꼬박 계모에게 건넸다. 동생들을 괴롭히지 말아 달라는 무언의 부탁을 계모들이 바라는 돈 봉투로 표현했다.



계모는 어릴 적 엄마가 좋아하는 공부도 하지 못하게 끊임없이 훼방을 놓았다. 그 갈증으로 어른이 된 엄마는 일을 하면서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방송통신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고, 설거지를 하면서도 라디오로 전공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달그락달그락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에 늙은 노교수의 목소리가 묻힐 법도 한데, 그녀는 항상 상위권의 성적을 따냈고 모든 학기를 빠르게 채워 졸업했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여러 대학원에 입학을 지원했다. 최종적으로 합격한 대학 중 집에서 가깝고 등록금이 지원되는 국립대학교의 박사과정에 등록했다. 똑똑한 그녀는 욕심이 많았다. 남편이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부터 바람을 피워도, 사랑 없이 부부관계를 유지하며 홀로 육아와 집안일을 도맡아가며 살았다. 그것이 오직 삶의 이유이고 목표인 것처럼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성실히 살았다.



어린 시절 계모에게 학대받은 일들은 내 엄마에게 왜곡된 확증을 남겼다. 그녀는 엄마가 되 어떤 일이 있어도 아이의 옆에 있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시련과 고난이 닥쳐도 제 새끼와 가정은 반드시 제 손으로 지키기로 다짐한 것이다. 그것이 본인을 파괴하고 깨트리는 방법이더라도, 설령 본인이 계모처럼 자신의 아이를 학대하더라도 그 모든 것이 가정을 지키기 위한 엄마의 역할이라고 믿었다. 남편이 외도를 하고 가정에 충실하지 않아도, 이혼해서 자신이 낳은 아이를 떠나지 않고 자신처럼 계모에게 구박받지 않게 하는 것이 엄마의 역할이라고 그녀는 믿었다.



그래서 엄마는 잘못된 선택을 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가장 많이 사랑했고, 가장 많이 원망했으며 죽도록 이해하려고 노력한 사람이기에 나는 그녀의 가장 큰 잘못을 안다. 그래서 그녀가 왜 암에 걸렸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암세포는 자율적으로 증식하고 주변의 정상세포를 파괴한다. 육체를 파괴하고 생명을 갉아먹는다. 자기 파괴적이다. 나의 엄마는 스스로를 사랑하고 아끼지 않았다. 스스로 사랑하지 않았기에 엄마는 암세포를 만들어냈다. 결국 스스로를 파괴했다.



부모를 일찍 여읜 남자에게 동질감을 느껴 그 남자의 인생을 구제하고자 동정심으로 모두가 반대하는 결혼을 강행했으며, 사랑 없는 가정을 유지하고 아이들을 낳아 길렀다. 녀는 자기 자신보다 가정을 유지하는 것을 더 우선으로 두었다.



삶의 순간순간 주요한 순간마다 엄마는 본인을 가장 후순위로 두었다. 예쁘고 좋은 옷 대신 먼지가 묻어도 티 나지 않는 검은 옷들 중에서 가장 무난하고 저렴한 옷을 골랐다. 스스로를 위한 건강한 한 끼 대신 가족 중 누군가 먹다 남긴 음식으로 식사를 때웠다. 인생에서 잠시 쉼이 주어지는 순간 쉬지 않고 가족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달렸다. 수면이 부족하면 휴식을 취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커피를 마셨다. 스스로 살고자 내면에서 보내 모든 신호와 경고를 외면했다. 걷지 못할 만큼 배가 아파와도, 진통제가 듣지 않아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 못난 남편과 철없는 아이들을 우선시했으며 자신을 희생했다. 정작 자기 자신은 돌보지 않았다. 마의 자기 파괴적인 모든 선택의 순간들 모여 결국 그녀를 난소암 3기 말 환자로 만들었다.



엄마는 내게 무수히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엄마가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엄마는 어린 시절 결핍으로 인해 반쯤 일그러지고 삐뚤어진 마음들 올바른 사랑이라 믿었을 것이다. 따듯하고 건강한 사랑을 받지 못해서, 스스로 삐뚤빼뚤하고 왜곡된 사랑의 기준을 정립했을 것이다.



만일 엄마가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내 결혼식 혼주석 한편이 비어있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함께 나의 임신과 출산을 축하하고, 아이 옷을 함께 고르고, 첫 손녀를 봤을지도 모른다. 제는 엄마가 되어 그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나와 마주 보고 그간의 긴 회포를 풀었을지도 모른다. 엄마가 끓여준 미역국을 먹다가 문득, 어쩌면 우리는 얼싸안고 울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엄마는 내 아이의 이름도, 얼굴도 모른다. 내 아이는 외할머니를 만나본적이 없어 그리움모른다. 나는 우리 엄마가 할머니가 된 모습을 평생 알 수 없다. 우리 엄마가 끓여주던 김치찌개 맛도 기억나지 않는다. 잊고 싶지 않은데 엄마 목소리는 사진을 봐도 벌써 가물가물하다. 그녀는 평생 쉰한 살이고 늙지 않을 텐데, 내 아이는 하루하루 쑥쑥 자라고 나는 어느새 엄마의 나이를 따라잡아 가고 있다. 이 사실들은 때때로 내 가슴을 사무치도록 아프게 한다.



나는 엄마를 사랑했다. 사랑했기에 엄마의 삶을 이해하고 싶어 발버둥 치며 살았다. 내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엄마의 유년시절을 곱씹으며 불쌍한 우리 엄마가 암환자가 되어야만 했는지 원인을 찾아 헤맸다. 왜 엄마 인생에서 고달픈 순간마다 모든 원망과 비난화살같은 여자였고 집에서 가장 약자였던 나에게 향했는지에 대해서도 합당한 이유를 찾으려 애썼다. 엄마를 위해 나는 정당한 죄인이 되려고 했다. 내 죄는 엄마 딸로 태어난 것이라고 합리화하려 애를 썼다.



나는 내 엄마를 너무나도 사랑했다. 엄마는 때때로 그녀 삶의 역사를 읊으며 내게 이야기했다.



" 피는 물보다 진해. 가족은 항상 같이 있어야 해.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을 떠나선 안돼. 그러니까 너도 우리 가족을 위해 희생해야 해. 너는 여자이고 딸이니까 엄마처럼 살아야 해. 엄마가 죽어도 너는 이 가정을 지켜야 해. "



그 당시 엄마 말은 내게 나침반이고 세상의 정답이었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이 다 썩어 문드러진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엄마가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엄마의 세상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 세상이 곧 다가올 파도에 무너질 모래성이더라도 나는 엄마와 파도를 기다리며 함께 서있다 휩쓸려 사라지고 싶었다. 암으로 엄마가 죽고 나면 이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때때로 상상했다. 어린 시절의 엄마와 지금의 내가 만나는 상상을. 저를 버리고 떠난 친엄마를 그리워하며 저보다 어린 두 남동생을 지키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던, 계모에게 학대받던 어린 내 엄마 손을 잡고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엄마, 힘들면 도망치고 숨어도 괜찮아요. 꼭 힘을 내지 않아도 괜찮아요. 모든 순간에 씩씩하게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포기해도 돼요. 희생하며 살지 않아도 돼요. 너무 열심히 살지 말아요. 혼자서 모든 걸 다 짊어지고 가지 말아요. 마음이 아프고 슬프고 화가 나면 혼자 삭히지 말고 꼭 표현하면서 살아요. 펑펑 울어도 돼요. 다음 생에는 온전히 본인을 위한 삶을 살아요. 스스로 사랑하며 살아요. 이번에는 꼭 다르게 살아요. 내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아도 괜찮아요. 오롯이 엄마를 위해서 살아요. 엄마, 나는 괜찮아요. 엄마는 그래도 괜찮아요. 가 응원할게요. 엄마, 다음 생엔 부디 아프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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