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데리고 여기저기 가봤자 너무 어려서 기억도 못한다고, 다 부모 욕심이라고 혹자는 이야기한다.
맞지만 틀린 말이기도 하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조차도 강렬한 한두 개의 순간 외에는 유년시절을 섬세하게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와 처음 타본 비행기,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난생처음 발을 담가본 바닷가, 낯선 이국에서의 저녁노을을 우리 아이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훗날 우리가 쌓아온 추억은 내 아이의 인생에서 든든한 거름이자 버팀목이 될 것이다. 차곡차곡 쌓은 추억들이 모여 기억이 되고, 연속적인 기억이 모여 인생은 살아볼 만하다는 긍정적인 정서를 형성해 줄 테니까.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 내 아이가 밝게 웃으면서 행복해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내 아이의 모든 순간들을 예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다채롭게 가득가득 채워주고 싶다.
우리 아이가 건강하고 행복한 성인으로 무사히 자라나서 훗날 나와 남편에게서 독립하는 그날까지. 이 세상에 태어나길 잘했다고, 세상은 정말 즐겁다고 스스로 얘기해 줄 그 어느 훗날까지 오늘도 내일도 우리는 아이와 부지런히 세상 곳곳을 다녀볼 생각이다.
내 능력이 닿는 선까지는 이 세상 곳곳을 다녀보고 싶다. 훗날 남편과 나 없이 아이가 세계여행을 해도 외롭지 않을 만큼. 아 여기도 엄마 아빠랑 왔었네 하며 작은 추억조각을 떠올리기를. 작은 욕심을 부려본다.
이번 연도 이른 여름, 아이를 데리고 베트남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밤비행기라 잠든 아이를 챙기랴 유모차를 챙기랴 수하물을 체크하랴 정신없는 푸닥거리를 끝내고 무사히 호텔에 도착해 한숨 자고 일어나 늦은 아침 이국에서의 여유를 즐기기 시작했다. 조식을 먹고 호텔을 산책하며 이리저리둘러보던 도중, 해변가에서내가 꿈꾸던 미래를 보았다.
해변 그늘막에서 한 노부부가 선베드에 누워 평화로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책을 읽고 할아버지는 십자말풀이를 하면서, 서로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지만 무언의 평화와 고요가 오가는 황혼의 시절을 스치듯 엿보았다.
지금 나는 내 어린 딸과 한시도 오디오가 비지 않는 복작복작하고 시끄러운 한 시절을 보내지만, 이 시절이 가고 세월이 지나 나에게도 황혼의 시절이 올 것이다. 내 아이를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시켜 독립시키고 나면 나도 멋지게 늙은 희끗한 머리로 남편과 그늘막 선베드에 누워 철썩철썩 치는 파도를 바라보며 인생의 어느 시점을 회상할 것이다.
세상에 하나뿐인 소중한 내 아이의 즐거운 모래놀이를 위해 뜨거운 태양 아래서 조개껍데기를 주워오고 양동이에 물을 퍼 나르다 피부가 빨갛게 익고, 기다리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고 못하는 부부가 아이에게 코끼리와 기린을 만나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려고 선풍기도 없는 무더위 속에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한 시간 가까이 아이를 안고 줄을 서서 기다렸던 그 시절을. 수시로 연착되는 새벽 비행기에 우리는 꾸벅꾸벅 앉아서 졸았지만 야무지게 챙겨 온 유모차에 아이는 두 다리 뻗어 깊은 잠을 재우면서. 피곤했지만 이번 여행도 정말 재미있었다고, 우리 이번에도 최선을 다했다고 서로를 독려하면서. 웃으며 잠꼬대하는 아이 얼굴 하나에 고생할걸 뻔히 알면서도 바보같이 또 캐리어를 챙길 것이다.
그 어느 미래에 이 뜨거운 해변가 선베드에 기대앉아 호시절을 떠올리는 늙은 우리를 기다린다. 이번 여행도 행복했다. 아이는 기억하지 못해도 나는 기억할 것이다. 낯선 이국의 뜨거운 태양빛만큼 빛났던 우리의 사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