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아 Aug 16. 2024

부모자격시험은 왜 없나요?

누구든 함부로 아이를 낳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날은 엄마가 출근하지 않는 날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엄마와 함께 있을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들뜬 마음으로 늘 그렇듯 엄마 주변을 서성이며 딴청을 피웠는데, 빨래를 개고 있던 엄마가 대뜸 내게 무언가를 내밀며 말했다.


"너희 아빠가 바람을 피우고 있어. 이걸 봐, 네 아빠가 다른 여자랑 바람을 피운다는 증거야."


흰 와이셔츠에 웬 여자 립스틱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엄마는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안방으로 가서 뭔가를 뒤적이더니 작은 반지를 꺼내 내게 건넸다.


"이 반지 보이지? 네 아빠가 바람피우는 아줌마한테 사준 거야. 네가 잘 가지고 있어."


엄마가 내게 준 반지는 엄마가 항상 끼고 다니던 반지들과는 전혀 다른,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빠의 바람과 바람피우는 아줌마 그리고 반지. 가끔 늦은 밤 엄마 옆에 쭈그려 앉아 사랑과 전쟁을 귓동냥으로 듣던 나는 초등학생이었지만 어렴풋이 그것들이 무슨 의미인지 빠르게 이해했다. 갑자기 감당하기 힘든 사실들이 쏟아지는 와중에 엄마는 아빠의 바람의 역사를 읊었다. 아빠는 엄마가 오빠를 낳자마자 바람을 피운 매정한 부모라고 했다. 그러면서 사실 너는 아빠와 사랑해서 낳은 아이가 아니고 그저 혼자인 오빠가 안쓰러워 낳은 아이라는 말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당시 나는 당혹스러웠고, 엄마는 대체 나에게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지 이 반지는 왜 내게 주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수천번 수만 번 내 엄마의 행적을 곱씹고 나름대로 분석해서 성인이 된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나를 빌어 아빠에게 복수한 것이다. 내가 아빠를 원망하고 미워하도록, 그리고 아빠를 증오하도록. 그녀의 감정을 내게 실어 존중받지 못하는 아빠로 추락하도록. 그러나 지금 한 아이의 부모가 된 나의 입장에서 냉정히 판단해 보았을 때, 우리 엄마가 한 행동은 부모자격이 있다면 박탈당할 만큼의 잘못이었다.


설령 배우자가 바람을 피웠더라도 그건 그 두 사람 간의 문제이다. 가정을 이뤄낸 그 사람 간의 믿음과 책임의 문제이기 때문에, 무조건 둘이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다. 그 사이에 아이가 껴있다라도 아이에게 최대한 영향이 가지 않는 선에서 서로 그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배우자아이 아빠는 역할도 관계의 대상도 다르다. 엄마에게는 배우자로서의 남편의 바람에 대해 아빠를 원망하고 비판할 자격은 있었으나 자식에게 아빠를 빼앗을 권리까지는 없었다. 더구나 아무 잘못도 없는 어린아이에게 그렇게 비겁하고 잔인한 방식으로 분노를 풀어서는 안 됐다.


그러나 엄마는 내게서 잔인한 방법으로 아빠를 빼앗아갔다. 비록 집에 한 달에 한 번 들어오는 아빠지만, 내 생일도 내 나이도 좋아하는 음식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아빠지만 아빠는 동네 새끼강아지 귀여워하듯 나를 보면 실실 웃었고 투박한 손으로 가끔은 내 머리도 쓰다듬어 주었다. 엄마와 오빠는 한편이었고 항상 나는 고립되었기 때문에 한 달에 한번 오는 아빠를 기다렸다. 무심한 아빠였지만 가끔 엄마 몰래 내게 용돈도 주었다. 아빠가 나를 잘 몰라도 나는 아빠를 사랑했었다. 엄마가 내게서 아빠를 빼앗아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고 나서 몇 달 후, 학원을 다녀와 고요한 집 내 방 안에서 늦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속삭이는 통화 소리에 불현듯 눈이 떠졌다. 거실에서 엄마가 누군가랑 통화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분명히 통화 상대는 우리 아빠가 아니었다.


"그래, 우리 저번에 갔던 거기 좋더라. 그래 자기야, 다음에도 거기서 만나자."


잠에서 덜 깬 멍한 눈을 깜빡이며 듣고 싶지 않은, 알고 싶지 않은 비밀을 또 알아버린 기분을 어떻게 갈무리해야 할지 고민했다. 계속 자는 척을 해야 하는 걸까, 오줌이 마려운데. 어떻게 하면 통화를 듣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방 밖으로 나가 화장실로 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오줌보가 터질 것 같아서 억지로 방금 잠에서 깬 사람처럼 어색하게 하품을 하고 눈을 비비며 천천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통화를 마치고 빨래를 개고 있던 엄마는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내 얼굴을 보자마자 어색한 내 연기가 무색하게 놀라며 물었다.


"너 집에 있었니? 다 들었어?"


내가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물어와서 당황한 눈빛으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급한 대로 화장실에 앉아 급한 볼일을 처리하니 정신이 들면서 물밀듯이 생각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빠의 바람도 엄마의 바람도 모두 내 잘못이 아닌데. 아빠가 바람을 피운다면서 내게 아빠를 헐뜯고 욕했으면서, 엄마는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목구멍까지 알 수 없는 분노가 부글부글 끓었다.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와 거실에 앉아 빨래를 개고 뜯어진 실밥을 라이터로 지지던 엄마 옆에 앉아 물었다.


"엄마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 모든 서운함, 그 모든 분노와 서러움. 두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마음과 우리 가족이 다 산산조각 나버렸다는 절망 속에서 겨우 그 한마디를 내뱉었다. 엄마 아빠가 나를 낳았잖아. 우리는 가족이잖아. 엄마는 아빠가 우리 가족을 배신했다고 말했잖아. 그런데 엄마가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그 길고 긴 말들을 겨우 하나의 문장으로 축약해서 용기를 끌어모아 내뱉은 순간 엄마는 날카롭게 받아쳤다. 엄마는 오히려 화내듯이 내게 반문했다.


"왜 안돼? 엄마도 사람이야."


그 말에 나는 숨이 턱 막혔던 것 같다. 겨우 초등학교 6학년인 아이는 그 말에 아무 말도 못 하고 목이 메었다. 만약 지금 엄마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면 왜 그래서는 안되는지, 지금 엄마가 겨우 13살 된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이 아이의 정서에 어떤 악영향을 미친것인지, 이게 얼마나 어른스럽지 않은 행동인지에 대해 구구절절 따지고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도 사람이라는 말 한마디에 엄마의 모든 행동은 정당화되었다. 나는 그 말에 더 이상의 아무런 이유를 댈 수 없었다. 그저 납득해야 했다. 그 말 한마디면 엄마는 면죄부를 받았다. 남편은 육아와 집안일을 함께하지 않고, 심지어 바람을 피우고 가정에 무심하니 나도 똑같이 되갚아주면 된다. 나도 사람이다. 참을 만큼 참았다. 아마 엄마는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 뒤로 엄마는 내게 비밀친구처럼 굴었다. 여느 날은 금으로 된 십자가 목걸이를 보여주며 만나는 아저씨가 사주었다고 했다. 아저씨는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없다고 했다. 내 사진도 보여주었는데 아저씨는 꼭 나 같은 딸이 가지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오빠에게는 말하면 안 된다며 내게 신신당부했다. 엄마 손에 억지로 이끌려 아저씨와 셋이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아저씨의 차를 타고 셋이 드라이브를 했다. 엄마는 아저씨 휴대폰을 검사하며 이 여자는 누구냐고 화를 냈다. 나는 처음 보는 엄마 모습이었다. 속이 거북했다. 먹은 걸 다 토해내고 싶었다.


아저씨는 내게 용돈을 주며 딸이라고 불렀다. 이 사람은 내 아빠가 아닌데. 우리 아빠는 따로 있는데. 엄마에게 따지고 싶을 때마다, 자리를 박차고 싶을 때마다 엄마가 내게 반문했던 한 문장이 떠올랐다. 엄마도 사람이야. 그 말은 마법처럼 내 입에 재갈을 물리고 귀를 닫게 만들었다. 엄마는 숨기고 싶고 버리고 싶은 감정들을 내게 쏟아냈다. 엄마는 내가 같은 여자이고 딸이라는 이유로 내 감정을 본인과 동일시하려 했다. 나는 감정 쓰레기통이 되었다. 엄마가 마구잡이로 던진 감정들은 내 마음속에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내 자아를 일그러뜨리고 내 가치관을 훼손시켰다. 나는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들을 도돌이표처럼 삼켰다.


엄마 그럼 나는? 나는 엄마 자식이 아니에요? 나는 사람이 아닌가요. 나는 엄마한테 무슨 존재인가요. 우리는 가족이 맞나요? 다른 집도 다 이렇게 사나요? 원래 다들 이렇게 사는 건가요? 엄마 나는 마음이 힘들고 벅차요.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싶어요. 왜 오빠는 아무것도 모르고 나는 다 알아야 해요? 엄마 너무 힘들어요.. 엄마 살려 주세요.


감정들이 벅차 견디기 힘들면 가끔은 숨죽여 울었다. 말로 내뱉고 표현하지 못한 감정들 켜켜이 쌓여서 차갑게 식었다. 그 모든 감정들을 감내하기 힘들어서 나는 그것들을 외면하기로 했다. 마음이 꽁꽁 얼어붙었다. 우리 집이 망하고 엄마가 암에 걸려도, 빚쟁이가 되어 우리 집에 세입자가 쫓아와 난장을 피워도 나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마주하지 않으면 무너지지 않으니까. 나는 내 감정들을 꾹꾹 눌러 담아 보이지 않는 곳에 미뤄두고 살았다. 그래야 다음 날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었다. 마주하지 않으면 평범하게 살 수 있으리라 여겼다.


25살, 처음 만난 상담 선생님은 여러 회기에 걸쳐 내 이야기를 듣더니 이야기했다.


"OO 씨는 항상 경직되어 있네요. 첫인상은 마치 군인 같았어요. 표정도 없고, 기계인간을 보는 것 같았어요. 살아남기 위해서 그런 거였군요. OO 씨는 마음이 참 강해요. 여기까지 살아서 왔네요. 너무너무 잘했어요. OO 씨는 생존자예요. OO 씨, 살아주어서 고마워요. 이야기해 주어서 고마워요."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비밀을 털어놓고도 혼나지 않고 칭찬받았다는 사실에 나는 엉엉 울었다. 일 년 가까이 진행된 상담의 매 회기마다 울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해도 상담을 하다 보면 나는 엉엉 울고 있었다. 주변에 도움을 청할 생각을 해본 적이 있나요? 한 번은 상담 선생님이 물어보셨다. 그날도 울지 않으려고 손톱 밑을 손톱으로 꾹꾹 누르며 나는 대답했다.


"엄마가요, 아무도 믿지 말라고 했어요. 자기도 믿지 말래요. 누구도 믿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상담 선생님은 눈시울이 붉어지셨다. 그리고 나와 나눈 이야기 중에서 가슴이 가장 아픈 말이라고 했다.


"아무도 믿지 못하면 누굴 믿고 사나요. 낳아준 엄마도 믿지 못하면 OO 씨는 어떻게 사나요. "


이야기를 하나씩 꺼낼 때마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어린 시절 상처를 하나하나 꺼내서 펼쳐놓고 복기하며 그때의 내 감정이 어땠는지를 말로 설명해야 했다. 내가 몇십 년간 소화하지 못해 쌓인 감정들을 숙제처럼 풀어내야 했다. 꼭꼭 씹어서 다 소화해 내야, 그래야 내가 앞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했다. 무슨 말이든 다 해도 된다고, 어떤 말이든 털어놓아도 된다고 하며 상담 선생님은 내 말을 다 믿어주고 받아주셨다. 일주일에 하루 한 시간. 마주 앉아 풀어낸 시간들이 일 년이 가까워졌을 때쯤, 나는 드디어 과거가 아닌 미래를 이야기했다.

선생님, 저 같은 애는 이 세상에 다시는 없어야 해요. 저 같은 아이가 다시는 태어나지 못하게 부모자격시험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정말 부모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들만 아이를 낳았으면 좋겠어요. TV에 나오는 정치인도 연예인도 다 부모가 있었잖아요. 누구나 부모 밑에서 자란 어린아이들이었잖아요. 부모가 이렇게나 중요한데 왜 시험이 없어요? 자동차 운전자들도 사고 내지 않으려고 운전면허 시험을 보잖아요. 운전보다 한 아이를 길러내는 게 이렇게나 어렵고 중요한데, 왜 대체 부모는 자격시험이 없나요? 누구도 함부로 아이를 낳지 못했으면 좋겠어요.


선생님, 저는 저희 엄마처럼 안 살 거예요. 저는 결혼도 할 거고요, 한 사람이랑만 사랑할 거예요. 아이도 낳을 거고요, 사랑을 아주 많이 많이 줄 거예요. 저 같은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 안 되니까요. 저는 엄마처럼 되지 않을 거예요. 선생님, 저는 아주 아주 다르게 살 거예요. 저는 꼭 엄마랑 다르게 살 거예요. 제 아이한테 안 그럴 거예요. 엄마처럼 되지 않을 거예요. 엄마를 이길 거예요.


그날은 처음으로 상담을 하면서 울지 않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