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꿈꿔왔던 미래를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바라왔던 평범하고 행복한 하루하루. 마음 놓고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엄마아빠가 있는 아이와, 다정한 남편. 그리고 이 세상에서 우리 가족을 제일 사랑하는 나. 동화 속에서나 존재할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결코 가질 수 없을 누군가의 평범하고도 부러운 삶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가끔 생각한다.
캄캄한 새벽,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표정과 편안한 숨소리로 쌔근쌔근 잠든 아이의 얼굴을 마주하기 위해 이 삶을 살아왔다고. 엄마라는 이름으로 너에게 불려지기 위해 삶의 골목골목 어려움을 헤쳐내고 이 순간까지 온 거라고.
너는 비록 내 삶에서 손님처럼 왔다 가고 우리가 마주 보고 사랑하는 이 순간은 찰나처럼 짧겠지만. 내 부모가 알려주지 못했고 주지 못했던 사랑을 네가 대신 알려주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생각해도 될까. 엄마 행복은 사랑이에요. 하고 단순하고도 명료하게 내가 30여 년간 찾아 헤맨 깨달음을 알려주는 너를 만나기 위해 기나긴 시간을 돌고 돌아 지금 이 순간이 왔다고 믿어도 될까.
그렇다면 어느 아파트 계단에 쭈그려 앉아 외롭고 속상하게 울던 어느 어린 날의 나에게로 돌아가서 꼭 알려주어야지. 얼룩덜룩 멍투성이로 지옥 같은 집에서 도망쳐 나와서도, 갈 곳 없고 찾는 이 없어 아파트 옥상 계단에 숨어 홀로 아픔도 슬픔도 삭이던 어린 소녀를 만나면 꼭 이렇게 이야기해 주어야지.
너는 아직 더 살아볼 법하다고. 절대로 지지 말고 절망하지 말고 조금만 더 살아보라고. 너만 바라보고 위하는 다정한 남편과 쉼 없이 조잘대지만 온몸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귀여운 딸이 가깝고도 먼 미래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고. 그러니까 죽고 싶어 하지 말고 조금만 더 버텨보라고.
믿지 못하겠지만 어느 미래에는 아무 조건 없이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줄 사람들이 반드시 기다리고 있다고. 그 미래에 너는 혼자가 아니고 절대 외롭지 않다고. 지금이 네 인생 가장 어두운 그늘일 뿐이라고. 이 세상 모든 밝은 빛들 뒤에는 모두 어두운 그림자가 진다고.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깜깜한 밤도 지나면 새벽이 오고 동이 트듯이 어색하게 네가 웃기 시작하는 날들도 분명 있을 거라고. 네가 받고 싶어 하던 조건 없는 사랑을 작은 핏덩이에게 주면서 스스로를 안아줄 날이 올 거라고. 스스로 사랑하고 사랑주기 시작하며 따듯한 기억으로 마음을 가득 채운 평범하고 멋진 어른이 될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과거로 다시 한번 더 돌아갈 수 있다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작은 아기였던 내 아이를 품에 다시 한번만 더 안아보고 싶다.
어스름한 저녁 작고 여린 내 아이를 안고 늘 불러주던 자장가들을 흥얼거릴 것이다. 소중하고 따스했던 내 품의 온기를 느끼면서 편안한 표정으로 스르르 잠에 들던 아이의 표정에 미소 지을 것이다. 그날의 날씨와 온도, 여린 아기를 위해 입었던 내 얇고 부드러운 순면 잠옷의 촉감까지 기억할 것이다. 그 모든 순간들과, 그 순간들이 쌓여 아이와 내가 이뤄낸 하루들을 떠올릴 것이다. 후회 없이 사랑했고 모든 걸 가진 듯 행복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어린 내 아이를 안고 똑같이 속삭일 것이다. 나는 듣지 못했기에 내 아이에게 잠들기 전 꼭 해줬던 이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할 것이다.
아가야. 이제 잘 시간이야. 엄마 아빠는 너를 만나서 정말 행복하단다. 너는 우리의 보물이야. 태어나줘서 고마워. 오늘 하루도 아프지 않고 건강하고 밥도 잘 먹어줘서 고마워. 우리 내일 하루도 재미있게 놀자. 엄마 아빠가 항상 너를 지켜줄게. 정말 많이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