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의 마지막(1)
당신의 죽음은 내게 해방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직전 2년간 엄마와 나의 만남은 없었다. 내가 가족들과 연을 끊고 집을 나가 독립했기 때문이다. 심리상담 선생님은 엄마와 물리적으로 분리되지 않으면 상담이 효과가 없을 거라고 나를 설득했다.
엄마는 암환자가 된 후로 더 히스테릭하게 굴었다. 엄마의 폭언은 아무 논리도 없었다. 호되게 시집살이를 시킨 큰고모를 닮아 내가 끔찍하다느니, 너 때문에 암에 걸려 인생이 망가졌다느니 등의 말은 흔했다. 엄마는 코앞에 다가온 죽음을 대비하며 나를 엄마와 같은 인생을 살도록 종용했다. 오빠와 아빠는 칠칠치 못하니 네가 살펴 챙기라며 신신 당부했다. 엄마는 가족 중 누군가가 일을 잘 갈무리하지 못하면 한탄하며 화를 냈지만 나는 사실 엄마가 기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족한 가족들의 모습을 보며 엄마는 아직 더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냈다. 내 엄마는 난소암 3기 말로 5년 이내 생존율 20% 미만이라는 잔인한 수치를 선고받았지만 7년을 생존했다.
엄마가 암 수술을 받던 날, 장장 12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받고 중환자실로 옮겨진 날을 아직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아무리 기다려도 문이 열리지 않는 수술실 앞 의자에 쭈그려 앉아 몇 시간을 꺼이꺼이 울었다. 엄마가 암환자라는 사실이, 코앞에 다가온 엄마의 죽음이 내게는 너무 벅차고 두려웠다.
수술을 집도한 의사 선생님은 깜깜한 저녁이 돼서야 탈진할 듯 지친 표정으로 수술실을 나왔다. 마스크를 벗으며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훑어보셨다. 퉁퉁 부은 내 눈을 바라보며 최대한 눈에 보이는 암 조직은 모두 제거했지만 이미 너무 많이 전이되어 있는 상태라 난소와 자궁, 복막을 포함해 약 6개의 장기조직들을 제거했고 중환자실로 옮겼다는 말을 건넸다.
엄마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지옥에서 천국을 오가며 나는 엄마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챙겨 오기 위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아빠와 오빠는 엄마의 암 수술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집 앞 호프집에서 둘째 삼촌에게 술을 마시자고 했다. 허둥지둥 짐을 챙겨 나오는데 삼촌이 전화로 나를 골목으로 불러내 이야기했다. 아빠와 오빠는 사람새끼들이 아니라며 욕을 했다. 나는 둘째 삼촌이 그렇게 슬픈 표정으로 화를 내는 것을 처음 보았다. 오빠는 이미 여러 번 사업을 실패한 아빠에게 엄마 암 보험금을 받아 다시 사업을 꾸리자며 얘기했고, 둘이 서로 술에 취해 낄낄거리며 사업 구상을 하더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차갑게 분노했다. 삼촌의 말처럼 그들은 내 가족이지만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 나는 그 둘을 양심의 가책 없이 내 마음속에서 가족 밖의 가장자리로 밀어냈다.
그러나 엄마는 삼촌에게 그 말을 전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양병원과 집을 오가며 헌신하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한 달에 두어 번 아픈 몸을 이끌고 몇 시간씩 고속버스를 타고 집에 올라와 암 진단금과 입원금으로 아빠와 오빠의 옷가지, 살림살이를 사나르고 반찬을 만들었다. 그들의 빨래를 했으며 식사를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쭈그려 앉아 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식은땀을 흘리고 그 모든 일을 해내고 다시 요양병원으로 내려가 끙끙 앓았다. 엄마가 집에 돌아오는 날 집이 깨끗하지 않으면 엄마는 내게 폭언을 일삼았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집에 오는 것이 좋으면서도 괴로웠다. 엄마가 요양병원에 가면 집안살림은 오롯이 내 몫이 되었다. 쌓인 집안일과 학업, 두세 개의 아르바이트를 동시에 감내해야 했다. 숨이 막혔다. 나는 짐승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엄마처럼 암에 걸려 죽고 싶지 않았다.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살기 위해 집을 나갔다.
2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는 엄마가 암에 걸리기 이전부터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살았고 미운 자식으로 차별받았으며 충분히 학대받았다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쥐어주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아빠의 사업 실패로 집이 망했을 땐 다이어트를 핑계로 석식을 굶고 왕복 두 시간 거리를 영하의 추운 겨울에도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열심히 걸어 다녔다. 학교 쓰레기장에서 남이 풀다 버린 문제집을 주워 풀며 공부를 했다. 빨리 대학에 진학해서 돈을 벌어 엄마를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악착같이 살아남아 20살이 되었는데 엄마가 암 3기 말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또다시 살아야 했다. 엄마가 암에 걸리고 나서 나는 대학교를 휴학하고 엄마 대신 가게를 운영하며 우리 집 생계를 책임지기로 했다. 대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자마자 휴학을 하고 장부도 볼 줄 모르던 내가 하루아침에 가게 사장이 되어버렸다. 만성 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이유 모를 복통이 시작되었는데, 종류별로 진통제를 먹어도 통증이 잦아들지 않았다. 겨우겨우 택시를 잡아타고 늦은 밤 응급실로 달려가 난소물혹 진단을 받고 다음날 아침 긴급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어 가게를 정리하게 되었다. 대학교에 복학해서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콜센터, 호텔 조리보조, 학원강사, 판매직 등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허리디스크가 걸려도, 무릎에 물이 차도, 근육통이 심해도 나는 정해진 시간에 꼬박꼬박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갔으며 아르바이트를 다녔다. 20년 넘는 세월 동안 나는 엄마를 위해 살았다. 아, 나는 할 만큼 했다. 그 생각이었다.
집을 나가기 며칠 전, 오빠와 마찰이 있었는데 그 사실을 안 엄마에게서 연달아 끔찍한 폭언 문자들이 왔다. 이번에도 역시 엄마는 내가 아닌 오빠를 선택했다는 절망에 나는 울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해외여행을 갈 때 쓰려고 고이 아껴두었던 캐리어를 열고 짐을 챙겼다. 집을 나가고 몇 주 후 엄마 몰래 남은 짐을 가져가기 위해 집에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내 방의 모든 짐이 종이박스에 포장되어 내 방에 한가득 쌓여 있었다. 엄마는 내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고 싶었던 사람처럼 그렇게 박스를 싸서 내 물건을 다 넣고 박스테이프를 붙여두었다.
차곡차곡 정리된 종이박스들을 마주한 순간, 이 집에서 20년이 넘도록 살았던 나는 아무 존재도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 헌신과 희생은 종이박스처럼 쉽게 포장되어 눈에 보이지 않도록 치워질 수 있는 거였구나. 충격을 받고 엄마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오랫동안 절절히 사랑한 연인과 이별하듯 엄마와 헤어지기 위해 마음속으로 무던히도 노력했다. 내 인생 통틀어 가장 가슴 아픈 이별이었다. 나는 내가 살기 위해 마음속에서 엄마를 떼어내야 했다. 일 년 간 심리상담을 받으며 하루하루 버텼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나는 오빠에게 성추행과 폭행, 집에서의 학대를 받았던 사실들을 바탕으로 시설의 도움을 받아 주민등록 열람제한을 신청해 두고 휴대폰번호도 모두 바꾸고 죽은 사람처럼 살았다. 때문에 가족들은 내 연락처도, 내가 사는 곳의 위치도 알 수 없었다. 아무도 나를 찾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를 고아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첫 직장에 들어가 사회생활을 배우고 저금을 하고 아등바등 살던 시간만큼 나는 성숙해졌고 내 엄마와의 끈은 약해졌고 희미해졌다. 마주하기 두려워 외면했다는 말이 맞겠다. 암에 걸린 엄마를 등지고 혼자 살겠다고 집을 나가버린 매정한 딸, 나는 스스로를 패륜아라고 여겼다. 때문에 마음 한편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 시한폭탄을 외면하며 내 인생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동거를 시작하고 결혼을 준비하며 평범한 하루를 살기 위해 노력하던 어느 주말, 나는 닭볶음탕을 만들고 있었다. 낯익은 번호로 전화가 왔다. 통화 버튼을 누를까 말까 망설이며 올 것이 왔다는 직감이 스쳤다. 아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