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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아 Sep 17. 2024

엄마와의 마지막(3)

당신의 죽음은 내게 끝끝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그리움이다.


기적처럼 엄마에게 사과를 받고, 사랑을 받았지만 슬프고 행복했던 찰나의 짧은 시간을 나는 기억한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한 달이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수시로 주고받았다.



요양병원과 대학병원을 오가면서 엄마는 마지막까지 살아보려고 했던 것 같다. 직장을 다니고 있어서 매일 엄마를 볼 수는 없지만 주말마다 면회를 가면서 그간의 비웠던 우리 사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나 또한 노력했다. 결혼을 앞둔 지금의 남편도 딱 한 번이지만 엄마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2주 전, 엄마는 자주 오지 말라며 내게 이야기했다. 한 시간의 면회도 힘들 만큼 엄마는 체력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전보다 더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살이 빠지고 산소콧줄 없이는 숨도 못 쉬던 엄마와 나는 바로 목전까지 다가온 죽음을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내일도 다음 주도 한 달 후에도 언제든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있을 것처럼 미래를 이야기했다. 엄마는 자기가 얼른 나아서 내 남편에게 산삼도 캐주겠다고 실없는 농담을 했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얘기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결혼할 사람을 보여주고 나서, 엄마는 삼촌에게 넌지시 이야기했다고 한다. 우리 딸이 이제 곧 결혼해야 하는데, 결혼식에 같이 못 갈 것 같은데 어떡하냐고. 좋은 날 앞두고 자기가 죽어서 좋은 날을 못잡거 아니냐는 한탄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 앞에서는 절대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내색 없이 내년 5월에 결혼을 하면 어떠냐고 내 손을 잡고 웃으며 얘기했다. 남편을 보고서는 참 다정하고 괜찮은 사람을 데려왔다며 처음으로 내게 칭찬도 해주었다. 엄마는 자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를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과, 더 살고 싶은 마음, 그렇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 앞에서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을 엄마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죽기 전날 엄마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빠에게 병시중을 부탁했는데, 깨끗하게 몸을 씻고 싶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아빠는 수건을 따듯한 물에 적셔서 엄마의 앙상한 몸을 닦아주었다. 아빠가 몸을 닦아주는 동안 엄마는 아빠에게 유언을 읊었다. 아이들에게 부담을 지우지 말아라, 건강관리는 똑바로 해라. 절대로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며 엄마는 아빠에게 신신당부했다. 그러고 나서 매사 계획적이던 엄마답게 자신이 죽고 나서 해야 할 일 들을 하나하나씩 덤덤하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자신이 쓰던 물건들은 모두 기부하거나 처분해 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부터 엄마는 연락이 뜨문뜨문 되지 않기 시작했다. 상태가 더 악화되고 더 이상 연락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통증이 극심해졌을 것이다. 엄마는 더 이상 내 전화와 연락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 다음에 오라는, 다음에 보자는 말만 뜨문뜨문 이어졌다. 어디에 있는지도 알려주지 않고 언제 보러 오라는 약속도 해주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엄마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느꼈고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언제고 엄마에게 연락이 올지 몰라서, 그 전화가 오는 것을 기다리지만 기다리지 않으면서 울다 잠들었다.





7월 4일 어느 새벽, 불현듯 자다 깨서 휴대폰을 봤는데 엄마 번호로 전화가 오고 있었다. 받아보니 친오빠가 엄마 휴대폰으로 내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엄마가 돌아가실 것 같으니 어서 와서 마지막 인사를 하라는 연락이었다. 새벽 다섯 시, 무슨 정신으로 나는 뛰쳐나가 택시를 잡고 탔는지 모르겠다. 인천의 모 병원으로 가 달라는 말을 하고 나는 택시에서 벌벌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일주일이 다 되도록 연락이 없던 엄마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썼을 문자가 엄마에게 와있었다. 내게 보낸 엄마의 마지막 문자였다. 카카오톡이 아니라, 문자로 와 있었다. 통증을 이겨내면서 마지막 힘을 다해 꾹 꾹 눌러쓴 문자였을 것이다. 이 문자는 사실 캡쳐본이 있었지만 이제는 없다. 내가 너무 자주 보며 힘들어해서 억지로 지워버렸다. 그러나 내용은 달달 외웠다. 엄마가 세상에서 내게 마지막으로 남긴 사랑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공주, 엄마가 많이 아서 병원을 옮기게 됐어. 치료를 받아야 해서 아주 나중에 만나야 할 것 같아. 나중에 만나자꾸나. 사랑한다.




엄마는 마지막 가는 길에 내게 상처를 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생사도 모르던 나를 겨우 다시 만났는데 죽기 직전 병시중을 들게 해서 고생을 시키고 싶지 않았고, 피할 수 없는 이 영원한 이별에서 내가 조금이라도 덜 아프기를 바랐다. 엄마의 거짓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이해하기 싫었던 이유를, 딸을 낳은 나는 이제야 이해한다. 수백 번 수천 번 엄마가 보낸 문자를 되씹고 나서 나는 마침내 사랑을 읽어냈다. 그건 사랑이었다.



공주야, 엄마가 곧 죽을 것 같아. 다시 못 볼 것 같은데 어떡하지. 너무 아파하지 말고, 슬퍼하지 말아. 아주 나중에 엄마 보러 와. 그때 다시 만나. 사랑한다.



엄마는 이 마음을 돌려 돌려 내가 가장 가슴 아파하지 않을 표현으로 고민해서 보냈을 것이다. 훌쩍 커버린 딸년이 엄마 죽음이 두고두고 한이 될까 봐 차라리 거짓말을 하자고 다짐했을 것이다.  평생을 걸쳐 엄마를 이해하려고 죽을 듯 노력했던 나는 이제 엄마 마음을 다 알아버렸다. 그런데 엄마는 이제 없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엄마 휴대폰을 전달받고 문자 발신목록을 확인하던 나는 그때 당시 엄마가 나와 삼촌에게 마지막으로 문자를 보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엄마의 사망보험금은 아빠와 오빠가 아닌 삼촌 앞으로 되어 있었는데, 엄마는 삼촌에게는 자신이 가입한 각 보험사의 이름과 고객센터 연락처 리스트를 보내고, 내게는 나중에 보자는 절대 지킬 수 없는 거짓말이 담긴 문자를 보냈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새벽 여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각, 택시에 내려 달려 올라간 병원 앞. 엄마는 산소호흡기를 껴고 이미 아무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심박수가 떨어져 가고, 나는 언제고 다가올 엄마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어디선가 봤었던 정보를 떠올렸다. 사람이 죽고 나서도 가장 나중에까지 살아있는 감각은 청각이라고 한다. 우리 엄마의 임종 때 나는 무한히 상상하고 되뇌던 이 말을, 완벽하지는 않지만 엉성하고 더듬대며 엄마 귓가에 속삭였다. 나를 두고 세상을 떠나는 엄마와 이제는 정말로 헤어져야 하기 때문에 나는 작별인사를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 나예요. 엄마 딸이에요. 엄마, 너무너무 고생했어요. 엄마 열심히 살아줘서 고마워요. 나는 엄마를 정말 많이 사랑해요. 엄마 나를 낳아줘서 고마워요. 내 걱정 말고 이제는 푹 쉬어요. 이제 아프지 마요. 우리 다음 생에 만나면 그때는 엄마가 내 딸로 태어나요. 내가 정말 많이 많이 사랑해 줄게요. 엄마 사랑해요.. "



몸과 마음으로 이미 수백 번 다짐하고 준비한 이별이지만 마음이 무너지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쉼 없이 눈물이 나왔지만 엄마에게 꼭 말해주고 싶었던 말을 내뱉었다.


나는 엄마에게서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엄마는 아무 미동도 없이 눈을 감은 채로 눈물을 흘렸다. 다른 가족들 인사에도 가만히 있던 엄마가 내 목소리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나는 엄마가 내 말을 들었다고 믿었다. 엄마가 내가 온 걸 알았구나. 내 목소리를 들었구나. 우린 결국 헤어지는구나. 이 짧은 생에서 엄마와 나는 영원히 헤어지는 거구나..


우리는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내 인사가 끝나자 의사가 덤덤하게 사망시각과 함께 엄마에게 사망선고를 내렸다. 그리고 그동안 엄마를 괴롭히던, 생명을 연장시켜 주던 몸속의 수많은 관들이 빠져나가고 하얀 천으로 엄마가 덮이는 걸 바라보면서 엄마가 더 이상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꿈에 딱 한 번, 엄마가 나온 적이 있다. 꿈속에서 나는 버스정류장에 앉아있었는데, 버스에서 엄마가 내려 나에게 왔다. 빼빼 마르지 않은 건강한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꿈속이라 엄마가 돌아가신 것도 깜빡 잊고 나는 엄마가 너무 반가워서 행복하게 헤헤 웃었다. 엄마가 여길 어떻게 왔냐고 물으니 엄마가 약속을 지키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딸, 엄마랑 여행 가고 싶어 했잖아. 엄마가 약속 지키려고 왔지.


엄마는 평생 일만 하느라 제대로 된 해외여행도 한 번 가보지 못했는데, 나는 죽기 전에 엄마랑 단둘이 제주도라도 가보고 싶었다. 우리는 그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나는 엄마와 서로 원망하고 미워하며 사느라 못 해 본 것들이 너무 많다. 나는 마땅히 내가 누렸어야 할 엄마와의 시간들을 몽땅 잃어버렸다.



그래서 꿈속이었지만 엄마가 건넨 한마디에 나는 마음 벅차게 행복했다. 그리고 그 벅찬 감정 때문에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설렘과 기쁨이 식어버리고, 곧바로 꿈이었다는 걸 깨닫고 가슴이 미어지도록 울었다. 처음엔 훌쩍훌쩍 숨죽여 울던 울음소리가 통곡이 되어, 옆에서 자고 있던 남편이 깜짝 놀라 깨어났다. 나중엔 새벽에 코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남편이 어나 말없이 나를 감싸 안고 토닥였다. 엄마와의 이별은 내게 너무 잔인했다. 내 세상 반쪽이 강제로 찢겨나간 기분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엄마를 닮아 계획적이고 씩씩하게 엄마의 흔적들을 지워나갔다. 동사무소에 가서 엄마의 사망신고를 하고, 대리점에 가서 엄마의 휴대전화를 말소하고. 그 모든 일들을 해나가면서 엄마의 휴대폰을 열심히 살펴봤다. 죽기 전에 엄마가 무슨 음악을 들었는지, 어디서 뭘 주문했었는지 무슨 사진을 찍었는지 등등 살아생전 엄마의 흔적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주인 없는 핸드폰을 가지고 혼자서 한참을 들여다봤다. 엄마는 유튜브로 음악을 들었는데, 마지막으로 들었던 음악이 김윤아의 봄이 오면이라는 음악이었다. 나도 잘 알고 부르는 음악이었다.



봄이 오면 하얗게 핀 꽃 들녘으로

당신과 나 단둘이 봄 맞으러 가야지

바구니엔 앵두와 풀꽃 가득 담아

하얗고 붉은 향기 가득 봄 맞으러 가야지

봄이 오면 연둣빛 고운 숲 속으로
어리고 단비 마시러 봄 맞으러 가야지

풀 무덤에 새까만 앙금 모두 묻고
마음엔 한껏 꽃 피워 봄 맞으러 가야지

봄바람 부는 흰 꽃 들녘에 시름을 벗고
다정한 당신을 가만히 안으면
마음엔 온통 봄이 봄이 흐드러지고
들녘은 활짝 피어나네


봄이 오면 봄바람 부는 연못으로
당신과 나 단둘이 노 저으러 가야지

나룻배에 가는 겨울 오는 봄 싣고

노래하는 당신과 나
봄 맞으러 가야지

봄이 오면 봄이 오면
봄이 오면 봄이 오면
봄이 오면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덤덤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티 내지 않고 밤마다 숨죽여 울었다. 길을 걷다 문득 사거리에서 엄마를 닮은 아주머니의 뒷모습만 봐도 눈물이 났고, 김윤아의 봄이 오면 노래를 들어도 눈물이 났다. 어림잡아 대충 아무거나 넣고 끓여도 뭐든 맛있게 요리하던 내가, 엄마가 끓여주던 김치찌개 맛을 흉내 내지 못해서 울고, 다음 해의 내 결혼식 날 비어있는 엄마의 혼주석을 보면서 울었다.



남은 짐을 가지러 간 아빠 집에서, 내 이름을 새겨 넣고 엄마가 나 먹으라고 손수 담가놓은 약초 진액 통을 보면서도 엉엉 울었다. 한 번도 쓰지 않고 고이 모셔놓은 식기류는 나 시집갈 때 쓰라고 엄마가 하나하나 신문지와 뾱뾱이로 싸두었는데, 나는 그 포장을 하나도 못 풀었다. 엄마가 죽고 나서도 엄마가 열심히 따서 말린 버섯과 약초들이 아직도 너무 많다. 한 번에 한 개만 넣으라고 엄마 글씨체로 쓰여 있는 반찬통을 나는 아직도 못 버린다. 엄마가 더 이상 아프지 않은 세상에서 혼자 남아 이 글을 쓴다.



엄마의 죽음은 내게 해방이었고 아픔이었고 슬픔이면서, 끝끝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그리움이다.


사실 아직도, 김윤아의 봄이 오면 노래를 들으면서 엄마와 내가 맞이하지 못했던 봄 혼자 남아 기다린다.


나는 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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