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카페는 간판이 없었다.
을지로 낡은 상가 3층. '기억 복원 전문'이라는 표지도, '추억을 찾아드립니다'라는 현수막도. 그저 회색 철문 하나. 벨을 누르면 안에서 작은 스크린이 열리고, 한 남자의 얼굴이 비친다.
"예약하셨습니까?"
"네. 박선우입니다."
문이 열리고, 눅진한 커피 향이 밀려왔다. 안은 의외로 평범한 카페였다. 낡은 원목 테이블, 은은한 스탠드 조명, 벽에는 손때 묻은 책들이 가득했다. 테이블마다 손님들이 앉아 있었다. 모두 헤드셋을 쓰고,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었다. 어떤 이는 미소 짓고, 어떤 이는 흐느끼고, 어떤 이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기억 복원 서비스, 통칭 리콜 라운지(Recall Lounge). 불법이었다.
2029년부터 기억 삭제가 합법화됐다. 트라우마, 이별의 아픔, 감당하기 힘든 실패. 정부는 '잊을 권리'를 보장했다. 문제는 부작용이었다. 기억을 통째로 지우면 빈자리가 생겼다. 지워진 기억 때문에 다른 기억까지 왜곡되기도 했다.
리콜 라운지는 그 지워진 기억을 '안전하게' 복원해 준다고 소문난 곳이었다. 뇌 신경망에 직접 접속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기억의 잔여 데이터'를 복원하는 방식.
나는 1년 전 기억을 지웠다. 1년 전 4월 17일. 딱 하루치. 아주 고통스러운 날이었다. 이유도 모른 채, 그저 '잊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리다 결국 병원을 찾았다.
이제 와서 복원하려는 이유?
잊었다. 내가 무엇을 잊었는지조차 잊었다. 텅 빈 하루. 1년 내내 그 텅 빈 하루가 나를 갉아먹었다.
안내를 받아 빈 테이블에 앉았다. 남자가 헤드셋을 내밀었다.
"착용하시면 됩니다."
2.
헤드셋을 쓰자, 귀 안쪽으로 미세한 진동이 울렸다. 눈을 감았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복원할 기억의 시간대를 입력하세요."
"1년 전 4월 17일. 하루치 전부요."
"본인 동의 확인."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내 뇌 속에서 기억의 잔여 데이터를 긁어모으는 느낌. 잊고 있던 퍼즐 조각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색깔. 잿빛이 감돌았다. 냄새. 흙먼지 냄새. 소리. 물 흐르는 소리.
점점 선명해졌다.
장면이 나타났다.
나는 낡은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다. 얼굴은 초췌했고, 눈은 공허했다. 익숙하지 않은 내 모습.
장소는 한강이었다. 4월의 쌀쌀한 바람. 갈색 물줄기.
그리고 — 기억 속의 내가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수십 통을. 받지 않았다.
점점 더 불안해지는 얼굴. 포기한 듯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난간을 잡았다.
차가운 쇠 난간. 물살이 거세게 흐르는 강.
기억 속의 내가 난간을 넘어섰다.
3.
"읍!"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기억 속의 내가 강물로 몸을 던지려 했다. 자살 시도.
그제야 이해했다. 내가 지운 기억은 '자살을 시도한 하루'였다.
남자가 말했다. "기억 복원을 중단할까요?"
"아뇨. 계속... 계속해 주세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왜 죽으려 했지? 기억 속의 나는 지금의 나와 너무 달랐다. 지금의 나는 삶에 대한 의욕이 넘쳤고, 매일 글을 썼고, 사람들과 어울렸다.
기억이 빠르게 이어졌다.
난간을 넘어선 순간,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붙잡았다.
힘센 팔이었다. 거칠게 나를 끌어당겼다. 나는 저항했다. 살려주려는 손길을 밀쳐냈다. 죽고 싶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포기하지 않았다. 나를 바닥에 눕히고, 꽉 끌어안았다.
"살아야 해! 선우야, 살아줘!"
눈물이 났다. 기억 속의 내가 울었다. 그 사람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었다.
그 사람은 나를 계속 안아줬다. 춥지 않게 코트까지 덮어줬다. 몇 시간이 지나도록.
나는 고개를 들었다. 기억 속의 내가 그 사람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 내 눈이 커졌다.
4.
기억 속의 나를 살려준 사람.
그는 — 내 남자친구였다.
아니, 지금의 남자친구였다. 1년 전에는 남자친구가 아니었다. 1년 전에는 내가 알지 못하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 사람을 1년 전에 만났다. 한강에서. 내가 죽으려 할 때.
그 사람이 나를 살려줬다. 그리고 — 그 사람과 나는 1년 뒤에 우연히 다시 만났다고 생각했다. 소개팅에서. 운명처럼. 사랑에 빠졌고, 지금은 6개월째 사귀고 있다.
그런데.
그 운명적 만남은, 사실은 1년 전 한강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왜 그는 내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지? 왜 그는 우리가 소개팅에서 처음 만났다고 했을까? 왜 그는 내가 기억을 지운 것을 알고도 침묵했을까?
기억 속의 내가 일어섰다. 그 사람도 일어섰다.
그 사람이 말했다.
"오늘 일을 기억 못 해도 괜찮아. 내가 다 기억할게."
그리고 기억 속의 내가 그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알아?"
그 사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알아. 하지만 네가 알아야 할 건 — 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거야. 넌 괜찮아질 거야."
그는 나를 다시 안아줬다. 마지막으로.
기억 복원 과정이 일시 중단됐다.
남자의 목소리. "나머지 기억이 과도한 감정적 충격을 줄 수 있습니다. 잠시 쉬어가는 걸 권합니다."
나는 헤드셋을 벗지 않았다. "아뇨. 계속해 주세요."
남자친구는 왜 내가 죽으려 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나에게 숨겼다.
5.
기억이 다시 이어졌다.
한강에서 돌아온 그 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공허했다.
새벽 3시. 벨이 울렸다.
누구지?
문을 열자, 남자친구가 서 있었다. 손에는 작은 박스 하나.
"선우야, 이거 마셔."
따뜻한 차였다. 달콤했다. 마시자마자 잠이 쏟아졌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 1년 전 4월 17일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나는 병원에서 기억을 지운 줄 알았다.
아니었다.
남자친구가 나에게 무언가를 먹였다. 기억을 지우는 약이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억 복원 최종 단계입니다. 중요한 정보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기억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나는 1년 전 4월 16일, 남자친구가 살인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자신의 직장 상사를 둔기로 때려죽였다. 내가 본 그날의 기억.
그 충격으로 나는 자살을 시도했다.
그는 나를 살렸다. 그리고 — 내가 그를 고발하지 못하도록, 내 기억을 지웠다.
그의 팔에 안겨 울고, 그의 코트 속에서 잠들고, 그의 손에 의해 기억이 삭제되는 그 모든 순간 — 그는 내 기억을 지키려 한 게 아니라, 자기 비밀을 지키려 한 것이었다.
그는 살인자였다.
그리고 그 살인자가 지금, 내 남자친구였다.
6.
기억이 복원 완료됐다.
헤드셋을 벗었다. 눈을 떴다.
카페는 여전히 조용했다. 다른 손님들은 여전히 헤드셋을 쓰고 눈을 감고 있었다. 어떤 이는 미소 짓고, 어떤 이는 흐느끼고, 어떤 이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남자가 내 얼굴을 봤다. "복원 완료됐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네."
내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무표정. 완벽한 무표정.
남자가 계산서를 내밀었다. "복원료 300만 원입니다."
나는 지갑을 꺼냈다.
"한 가지 더." 내가 말했다. "내 남자친구도 이곳에 왔었나요? 기억 복원이나 삭제를 위해."
남자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직업윤리 때문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 하지만 그의 눈이 흔들렸다.
"개인 정보입니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가 살인자입니다."
남자의 눈이 더 커졌다.
"나는 그가 살인하는 걸 봤어요. 그리고 그는 내 기억을 지웠어요. 그가 당신에게 이걸 의뢰했을 리가 없어요. 지우는 걸 의뢰했겠지."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박선우 씨의 남자친구, 김민준 씨는 1년 전 4월 17일, 당신이 기억을 지우기 직전에 이곳에서 기억 삭제 서비스를 받았습니다."
"무엇을 지웠나요?"
"그날 당신을 한강에서 살려준 기억. 당신이 그가 살인하는 것을 목격한 것을 그가 알게 된 기억. 그리고 당신이 그에게 사랑을 느낀 기억을 지웠습니다."
"그럼 그는 지금 제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나요?"
"네. 그렇게 설정했습니다."
7.
나는 카페를 나섰다.
을지로 낡은 상가 3층. 회색 철문. 밖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내 폰이 울렸다. 남자친구였다. "선우야, 점심 먹었어? 오늘 저녁은 뭐 먹을까?"
다정한 목소리.
나는 휴대폰을 귀에 댔다.
"민준아."
"응?"
"오늘 저녁은 — 네가 좋아하는 거 먹자."
내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는 웃고 있었다.
복원된 기억 속의 내가 울던 그 사람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던 그 초췌한 여자와 지금의 나는 너무 달랐다.
나는 살인자와 데이트하는 여자였다. 그 사실을 아는 유일한 사람.
내 남자친구는 내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를 — 증오한다.
하지만 그 증오를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다. 내 입꼬리는 올라가 있고, 내 눈은 다정하게 휘어져 있었다. 완벽하게.
복원된 기억은 나를 바꾸지 않았다.
새로운 '나'를 만들었다.
완벽한 무표정 뒤에 모든 감정을 숨기고, 완벽한 연기를 할 수 있는 사람.
살인자를 사랑하는 척하며, 그의 심장을 조용히 저미는 것을 꿈꾸는 사람.
점심은 뭘 먹을까? 내가 좋아하는 거 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