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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카피 Mar 02. 2020

카메라 가방

좋은 물건이란 어떤 물건인가?

  카메라 가방을 너댓 개쯤 가지고 있다. 사진 찍은지 삼십몇년이 넘은 걸 생각하면 많은 건 아니다. 정말 많이 가졌을 땐 열서너 개의 가방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본격적인 사진 취미를 그만두기로 하며 몇 개의 가방은 팔고, 몇 개는 지인들 주고, 남겨둔 것들 중 두 개는 뒤늦게 사진장비병에 빠진 어머니 드리고 내 손에 남은 것이 이 너댓 개다.


  남은 가방은 매일 출퇴근할 때 일상용으로 쓰고 있다. 아티산&아티스트의 소형 방수가방이 요모조모 편해서 거의 데일리 백 역할을 하고 있고, 돔케 F-2는 조금 짐이 많은 날이나 여행/워크숍 갈 때 쓰고 있고, 로우프로의 줌 백은 망원렌즈를 마운트한 카메라를 넣는 원래의 용도와는 거리가 먼, 자잘한 잡동사니를 잔뜩 쌓아 넣고 다닐 때 쓴다. 아, 이 로우프로 줌백도 작년에 어머니께 또 드렸지 참. 역시 일상용으로 편히 쓰는 돔케 F803이 있고, 그리고 이 가방들에 달 수 있는 악세사리 백 한 두 개.


  얼마전 가지고 놀 게 필요해서, '순수하게 만지작거리며 놀' 장난감으로 수 년만에 카메라와 렌즈 두 개를 샀더니, 왠지 가방도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고 다닐 때 쓰던 걸 메고 싶어졌다. 그래서 꺼내 요즘 가지고 다니는 가방이 [빌링햄 포토하들리 프로]다. 이 가방도 정말 많이, 거의 매일 들고 다니던 가방이다.  


  포토하들리는 1988년에 출시된 베스트셀러이고, 그중 상단에 손잡이가 달린 프로 버전은 한참 뒤인 2004년엔가 나왔다. 출시되자마자 충무로 세기포토에 달려가 샀으니 내가 이 가방을 쓴 지 대충 십수년이 지났다. 검정색 하들리 프로가 있으니 다른 색, 다른 모양으로 카메라 가방을 하나쯤 더 사고 싶어져 일주일 정도 검색/분석을 했다. 내가 떠나(?)있는 사이 사진판에 나온 수많은 가방들을 대강 다 살펴보았다. 생각(희망?)과 달리, 이건 이런 문제가 저건 저런 문제가 하나씩 있다. 스펙이나 모양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사진을 오래 찍어온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작은(하지만 중요한) 문제들이 있는 것이다. 수납공간의 문제, 여닫음의 문제, 몸과의 밀착도의 문제, 멘 상태로 촬영할 때의 안정감 문제, 장비를 꺼내고 넣을 때의 문제, 바닥에 놓을 때의 문제, 내구성의 문제, 장비 보호의 문제, 사진장비가 아닌 일상의 물건들을 넣어 가지고 다닐 때의 문제...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없으니 선택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단점이 안보이는 가방도 좀 찾긴 했는데, 그것들은 디자인이 내 성에 차지 않는다. 좋다 나쁘다라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내 취향은 아니다.


  그러니 결국 빌링햄 포토하들리 프로가 남는다. 다른 색으로 하나 더 살까 생각중이다. 물론 그런 마음의 사치를 부릴 대상으론 비싸서 정말 사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산다면 이번엔 세이지/탄 컬러다.



  좋은 물건이란 무엇인가? 아니, '좋음'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그것은 '새로움'의 반대쪽에 있는 무언가다. 새로움이 나쁜 게 아니라, '새로움'이 '좋음'이 되는데까지 아주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이고,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새로움' 중 아주 소수만 '좋음'의 자격을, '오래 가는 좋음'의 자격을 얻는 것이다. 물건 뿐 아니라 감정도, 관계도, 통찰과 지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다른 색으로 이 가방을 하나 더 사기 전에, 일단 살짝 갈라지며 동그랗게 말리기 시작한 프론트 스트랩을 신품 부품으로 한 세트 주문했다. 아직도 부품을 판매한다는 게 조금 신기했다. 그것도 생각보다 비싸지 않은 가격- 한 쌍에 이만 이천원에. 그 부위 말고는 십이년 넘게 쓰고 있는 이 가방은 아직도 깨끗하고 단정하다. 수많은 카피품들에게선 찾기 힘든 단정함- 내가 좋아하는 단정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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