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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카피 Mar 17. 2020

나사와 태엽의 은하

커스텀 시계를 만들며

  시계 취미를 가지는 사람들이 또 대개 그렇듯, 나도 처음엔 날카롭고 존재감있는 시계가 좋았다. 메탈 브레이슬릿이 손목에 닿는 차가운 느낌이 좋았고, 웅웅거리며 돌아가는 로터의 다이나믹한 존재감이 좋았다. 그래서 ORIS의 묵직한 시계를 3년 넘게 찼다. 나이를 먹어서이기도 하고, 시계라는 하나의 대상에 좀 더 익숙해져서이기도 하겠지만, 지금은 따뜻하고 예스런 시계가 좋다. 심지어 노티난다고 질색하던 금장 시계도 참 좋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지름 34mm 남짓의 작은 빈티지 시계들이 좋아질 날도 올지 모르겠다. 아직은 아니지만. 아니라서 다행이지만.


  좋아하는 후배 여자아이의 손목에 작은 시계가 있었다. 까르띠에의 평범한 금장 시계였는데, 까르띠에나 불가리같은 쥬얼리 메이커의 시계들을 폄하하는 경향이 완연한 시계 마니아(?)의 한 사람인(^^) 나 역시 그 아이의 시계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부유한 집 아이답게 어머니 것을 그냥 차는 거라는 그 시계를 특별히 애지중지하거나 신경 쓰거나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내가 즐겨 쓰는 표현으로 '흰빵같은 아이'라는 생각을 했다. 비싼 장신구나 자랑할 수단이 아니라 그저 편히 차는, 일상과 일신의 한 부분이 된 시계란 참 예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런 생각을 하고 다시 보니 흔하다고 생각해 관심 갖지 않았던 까르띠에의 그 디자인이 새삼 얼마나 잘 만들어진 것인지, 작고 얇은 그 형태가 실은 얼마나 깊은 존재감을 가지는지 알게 되었다. 그 잘 만들어진 시계와, 그 잘 만들어진 예쁜 시계를 편히 찰 수 있는 여유로움과, 그 시계와 사람이 만드는 흰 빵같은 아우라를 나는 동경했던 것 같다.


  언젠가부터, 작은 꿈이 있었다. 금 케이스의, 클래시컬한 문자판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무브먼트를 씨스루백으로 볼 수 있는,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 시계를 가지고 싶다는. 당연한 얘기지만, 모든 좋은 물건은 비싸다. 조건을 만족시키면서 내 눈높이를 만족시킬 만한 시계들은 너무 비쌌다. 그래서 생각했다. 살 수 없다면, 만들자-



  커스텀 작업의 본체가 될 시계는 이베이에서 구했다. 바크만(WAKMANN)은 1940년대부터 70년대까지 브라이틀링의 크로노그래프 시계들을 미국에서 판매하던 메이커였다. 이 시계에 사용된 무브먼트는 기계식 무브먼트들이 절정기를 구가하던 시기, 그 중에서도 돋보이는 스펙을 자랑하는 벨쥬(VALJOUX)사의 캘리버 730이다. 이 정도 레벨의 무브먼트를 사용한 현행 시계라면 그 가격은 쉽게 수천만원대를 넘어간다. 솔리드 골드 케이스는 아니지만, 요즘의 얄팍한 도금이 아니라 금을 통째로 얇게 썰어 붙인 '포금' 케이스가 수십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반짝인다. 잘 보존된 멀쩡한 문자판을 과감히 밀어버리고, 내가 직접 디자인한 문자판을 예지동의 공방에 맡겨 제작했다. 현행이 아닌 브라이틀링의 옛 로고를 넣고 그 아래 바크만의 로고를 함께 썼다. 아래쪽 서브 다이얼 위엔 'hyuncopy custom valjoux c.730'이라는 문구를 넣었다. 케이스 뒷면 역시 전문 장인에게 작업을 맡겨 속이 들여다보이는 씨스루백 형태로 가공했다. 비용과 노력을 아끼고 효율과 이윤을 숭상하는 요즘의 물건들에선 찾아보기 힘든, 작은 우주의 풍경... 나사와 태엽의 은하가 그 안에서 째깍째깍 흘러간다.

  까다롭게 골라 구한 엘리게이터 스트랩을 끼우고, 디버클을 장착하고, 하염없이 뒷면의 무브먼트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일이십분이, 한두시간이 훌쩍 지난다. 내가 꿈꾸되, 살 수 없는 모양의 생이, 시간이 그 안에 있다. 낯설지 않은, 처음 보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보고 있었던 것 같은 모습이다. 한없이 소진하고 잃기만 할 뿐, 수복하거나 새로 들일 수 없는 꿈, 동경, 욕망같은 것들로 이루어진, 기껏해야 하나의 시계로, 한 장의 사진으로 달랠 수 밖에 없는 그리움이 그 안에서, 하염없이 들여다보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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