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미 나 자신이 누군가가 샤워 후에 실수로
탈의실에 두고 간 수건처럼 느껴진 지 오래였다.
- 슈테판 셰퍼, <내게 남은 스물다섯 번의 계절> 중에서 -
나는 늘 책을 읽는다.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게 제일 좋았다. 다른 재주가 없어서 책 읽는 게 마음 편했던 것도 있다. 책만 읽으면 현실 도피도 가능했다. 가끔 뭔가에 꽂히면 밤새 책을 읽고 학교에 가기도 했다. 수업 시간에 몰래 소설을 읽다가 선생님께 혼난 적도 있다. (선생님, 죄송했습니다) 그러니 이 나이가 되어도 책이 참 좋다. 너무 책에만 빠져있어도 곤란하겠지만, 책 덕분에 살겠다는 생각도 한다.
우울증 치료를 시작하면서 많은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 마음에 훅 들어오는 문장을 발견하면 바로 필사하고 낭독해 본다. 나는 왜 이런 문장을 써내지 못할까 자책한다. 역시 자책은 우울증 환자의 병증 중 하나이다. 슈테판 셰퍼가 쓴 이 한 문장에 눈물이 툭, 떨어졌다. 실수로 탈의실에 두고 간 수건이라니. 그 정도로 내가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사라진 상태. 문장만으로도 우울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나는 잊히고, 버림받고, 분실됐다. 하지만 그렇게 된 데는 이렇다 할 이유도,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모든 것을 바꿔 버린 어떤 전환점도 없었다. 이유는 오로지 나였다. 이런 마음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만드는 내 능력은 포핸드 실력보다도 뛰어났다. 다들 나의 성장에 투자한 데다 나에게 희망을 걸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누가 갑자기 그만두고 싶다고 말할 수 있으랴? - 슈테판 셰퍼, <내게 남은 스물다섯 번의 계절> 중에서
우울증 치료 초기에 딱 저런 심정이었다. 나는 버림받은 것 같았다. 아무도 나를 버리지 않았다고 했겠지만, 나는 나의 커리어, 나의 회사, 나의 사무실, 나의 컴퓨터에게 버림받은 것 같았다. 절망적이었다. 나 그만두고 싶었다. 출근하는 게 죽기보다 더 싫었던 그때, 나를 붙들었던 것은 회사에 다니는 엄마가 좋다는 두 아이들과 언제나 나를 믿고 응원해 주는 남편,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 덕분이었다. (여기에 독서도 포함된다)
나의 존재가 분실물처럼 초라해진 것 같아지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그럴 때마다 5분이라도 책 읽기에 집중해 보려고 애썼다. 한 권을 다 읽으려는 욕심을 버렸다. 툭 펼쳐서 시선이 가는 문장을 건져 올려 하루 종일 곱씹기도 했다. 우울증 치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독서법이란 특별하지 않다. 내 삶의 균형감과 평온함을 되찾기 위해 최대한 힘을 빼고 책을 펴는 것. 그게 전부인 것 같다.
그럼에도 그때 내 균형은 어딘지 모르게 흐트러져 있었다. 주말이면 자연으로 도망칠 수 있다는 건 특권이었지만, 오늘처럼 이곳에서조차 마음의 평안을 찾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 나는 마음이 평온해지는 일이 드물었고 그조차 대개 몇 분 가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언제나 일 생각이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어서 마음이 고요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행복하게 여겼는데, 경력이 쌓이고 휴대폰을 신형으로 바꿀 때마다 나는 점점 더 어디서나 연락이 닿고 매사에 이용 가능한 사람으로 변해 갔다. - 슈테판 셰퍼, <내게 남은 스물다섯 번의 계절> 중에서
우울하다면 쉽지 않겠지만 책을 펴보자. 아무 책이라도 좋다. 끝까지 완독 하겠다는 마음을 버리자. 책 내용을 내 것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욕심도 내려두자. 그저 마음의 평안을 되찾기 위해,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기 위한 보조장치(책)의 도움을 받는다고 믿어보자. 그거면 충분하다. 그림책도 좋고, 만화책도 좋다. 글이 없는 책도 좋다. 이만하면 살만한 인생이라는 것, 나란 사람이 사랑받을 자격은 차고도 넘친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해 줄 수 있는 책은 많다. 그러니 독서를 포기하지 말자. 종이책을 넘기며 울고 웃는 순간까지 외면하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