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주 동안 우울한 정도를 스스로 알아보기 위한 질문입니다. 높은 점수가 나왔을 경우에는 우울증의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 정확한 평가를 위해서는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볼 것을 추천합니다. - 정신건강검사(PHQ-9) 안내문 중에서
매년 5월 말에 건강검진을 받는다. 회사에서 지원해 주는 건강검진이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 아무 이유 없이 건강검진을 받지 않으면 회사가 벌금을 내야 한다고 들었다. 어쨌든 매년 건강검진을 하는 일은 나와 회사를 위해 좋은 일이니 빼먹지 않는다. 그런데 올해 건강검진을 앞두고 괜히 떨리고 걱정이 된다. 작년 말 중증 우울증 진단을 받고, 약물치료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이 받아본 질문이니 낯설지는 않은 문항들이다. 그런데도 답할 때마다 살짝 숨을 참았다. 정말 나의 우울증은 나아지고 있는지, 많이 나아졌는지, 혹은 완치된 것일지 기대반 걱정반 오들오들 떨렸다.
답은 전혀 아니다 / 여러 날 동안 / 일주일 이상 / 거의 매일 이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 일을 하는 것에 대한 흥미나 재미가 거의 없다
- 가라앉은 느낌, 우울감 혹은 절망감
- 잠들기 어렵거나 자꾸 깨어남, 혹은 너무 많이 잠
- 피곤함, 기력이 저하됨
- 식욕 저하 혹은 과식
- 나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는 느낌 혹은 나 자신을 실패자라고 느끼거나 나 때문에 나 자신이나 내 가족이 불행하게 되었다는 느낌
- 신문을 읽거나 TV를 볼 때 집중하기 어려움
- 남들이 알아챌 정도로 거동이나 말이 느림, 또는 반대로 너무 초조하고 안절부절못해서 평소보다 많이 돌아다니고 서성거림
- 나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등의 생각 혹은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를 자해하는 생각들
놀랍게도 대부분의 질문에 '전혀 아니다'라고 답할 수 있었다. 여전히 '여러 날 동안'에 체크할 수밖에 없는 문항이 있었지만 괜찮았다. 여전히 잠을 길게, 푹 자는 날보다는 자주 깨거나 쉽게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있다. 하지만 매일 그러진 않아서 괜찮다. 집중력이 떨어졌지만, 안간힘을 써서 집중하려고 한다.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몸을 움직이거나 글을 쓴다. 최대한 더 자주 웃으려고 하고, 마음이 가라앉을 때마다 재빨리 알아차리려고 한다.
그렇다, 나는 최선을 다해 내 삶을 감당하고 해결하고, 이 어려움을 넘어서려 하는 게 분명하다.
삶을 감당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닥쳐오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기꺼이 스스로 해결하고 넘어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제 삶의 주인이 되어 그 자리를 지킬 힘을 갖추는 것입니다. - 김용규, <어제보다 조금 더 깊이 걸었습니다> 중에서
매년 건강검진을 할 때마다 두려움이 앞선다. 작년보다 체지방이 더 늘었거나, 갑상선에 혹이 하나 더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기가 무서웠다. 올해는 우울증까지 하나 더 추가됐다. 그래도 나는 삶을 감당하려 한다. 워낙 걱정이 많은 편이니 이제 걱정은 그만! 외쳐도 소용이 없다. 건강검진을 앞두고 걱정이 시작됐지만, 그래도 나는 괜찮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이렇게 조금씩, 천천히 나는 나아지고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