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 다 엄마를 닮아 비염이 있나 보다. 왜 그런 걸 닮고 그런다니...
언젠가 시아버님께서 툭, 던지신 말씀에 가슴이 아팠다. 아이들이 훌쩍거리고 코를 풀거나 눈이 빨갛게 된 모습을 보시고는 안타까움에 하신 말씀일 텐데 내가 죄인이 된 것 같았으니까. 그나마 엄마의 나은 점만 모으고 모아 닮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유전의 법칙은 예외가 없다. 내가 가진 것 중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차별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전달된다. 그러니 나부터 잘 살아야지, 좋은 모습 본보이며 살겠노라 다짐했지만 어렵다. 엄마의 삶이란 기쁘고도 어려운 길이 맞다.
열네 살, 아홉 살 두 아이는 아빠와 엄마를 골고루 닮았다. 안타까운 건, 겉모습은 아빠를 더 많이 닮은 것 같지만, 속은 엄마를 더 닮은 것 같아서다. 올해 중학생이 된 큰 아이는 엄마처럼 거북목, 일자목에 척추 측만증상까지 있다. 알레르기 비염도 있어서 심할 땐 병원에 가서 약을 처방받아먹어야 가라앉는다. 더 기가 막힌 건, 중1이 벌써부터 속이 쓰리고 아프다며 약을 먹는다. 이런, 나도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위염을 앓았다. 왜 이런 걸 닮느냐 말이다.
아홉 살 둘째도 만만치 않다. 잘 먹고 잘 크고 있어서 별 걱정 없겠다 싶었지만, 태어나서 아토피 증상이 있어서 부랴부랴 막느라 혼났다. 견과류 알레르기로 아직 땅콩이나 아몬드에 반응해서 학교 급식에서도 피한다. 아토피는 나아졌고, 비염은 새로 얻었다. 코가 약해서인지 코피도 자주 난다. 공기 좋지 않은 곳에 살아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두 아이들 모두 나와 똑같은 증상을 보인다. 이런 아이들을 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모든 게 내 탓인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였을까. 아이들을 낳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늘 꿈꿨다. 출퇴근길 옴짝달싹 못하는 지하철 안에서 마음은 어딘가의 시골에 있었다. 도시를 떠나 공기 좋은 곳에서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되뇌었다. 그러다 두 가지 질문에 다다랐을 때 포기하곤 했다.
시골에 가면 뭘 해 먹고살지? 아이들 교육은 어떻게 하지?
이상주의자이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아줌마라 어쩔 수 없었다. 그저 회사일이 고되고, 육아가 내 마음처럼 잘 되지 않을 때 사진 속 통나무집으로 '마음으로만' 도망가기 바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진짜 꿈꿨던 삶은, 내가 좋아하는 산, 물, 숲이 모여있는 곳에서 단순하게 먹고 몸을 쓰며 일하면서 남는 시간에 책을 보거나 글을 쓰는 삶이 아니었나. 마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에서의 삶처럼 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중학생, 초등학생을 키우는 엄마로서 그런 꿈을 꾸는 것도 죄스러웠다. 우리 집 앞 학원가에 아이들을 보내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난 그냥 아이들이 학원 가느라 저녁밥을 밤 9시가 넘어 먹이기 싫을 뿐이었다. 학원이 없어도 공기 좋은 곳에서 비염약 먹이지 않고 아이들을 키우고 싶었다. 대책 없는 엄마의 마음은 그랬다.
휴직도 했는데 아이들 데리고 시골에서 살아보면 어때?
어느 날 남편이 툭, 던진 한 마디에 동요했다. 그래, 이번이 기회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머릿속으로만 달려가던 곳으로 이제는 갈 수 있다. 겁이 많은 내가 지금 당장 귀농 귀촌을 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살짝 맛볼 수는 있을 것이다. 반년 정도 아이들과 공기 좋은 곳에서 살아보면 나름의 해답을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아이들에게도 한 번쯤 환경을 바꿔줘도 괜찮지 않을까? 정말 공기 좋은 곳에서 머물면 콧물과 재채기로부터 해방되는지 확인도 해볼 겸 말이다.
학원이 없어도 공기 좋은 곳에서 사는 게 가능한지,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내게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으니 신나게 해 봐야겠다. 나는 집중할 거리를 찾으면 무섭게 몰입할 수 있다. 행동이 빠른 사람이니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시킬 수도 있다. 어렵게 얻은 1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내 손에 달려있다.
* 함께 읽으면 좋은 글 (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