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부터 집 공사를 좀 해야 하는데 미안해요.
이거(수박) 아이들이랑 맛있게 드세요.
늦은 밤, 초인종이 울렸다. 시어른들을 제외한 손님이 그 시간대에 방문하는 경우는 없다. 누굴까 궁금했는데 윗집 아주머니셨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늘 반갑게 인사 나누는 사이였으니 얼른 달려 나갔다. 양손에는 수박이 들려 있었다. 우리 집 앞에 사시는 아주머니도 달려 나오셨다. 수박이 2개였으니 배달지도 2개였나 보다.
한 달간 인테리어 공사를 하시겠다고 했다. 소음이 심할 테니 미안해서 수박을 사 오셨다고 했다. 날도 더운데 아이들이랑 같이 먹으라고 따뜻하게 말씀해 주셨다. 주말과 공휴일에는 공사하지 않으니 안심하라는 말씀도 덧붙였다.
아, 예전 같았으면 사람 좋은 얼굴로 이랬을 거다. "아유, 저희 신경 쓰지 마세요.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는걸요."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다르다. 휴직하고 난 이후 집에 머무는 시간이 곱절로 많아졌으니 말이다. 순간 아, 한숨이 나올 뻔했지만 잘 참아냈다. 걱정 마시라고, 공사 예쁘게 잘하시라고 덕담을 건넸다. 수박을 받아 들고 딴 소리를 할 수야 없지 않나. 또, 언젠가는 우리도 공사를 할 수 있을 테니. 지금 사는 집은 자가가 아닌, 전세라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말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25층까지 층별로 두 세대씩 있다. 여기에 엘리베이터는 단 한 대.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치는 이웃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곤 하지만, 따뜻하게 인사를 나누는 집은 일부다. 어떤 분들은 민망할 정도로 모른 척하기도 하지만, 뭐 그러려니 한다. 모르는 사람끼리 인사하는 걸 불편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을 테니까. 그래도 우리 집 아들들에게는 반복해 교육시킨다. 누굴 만나든 먼저 인사하라고. 인사해서 손해 볼 일은 없다고 말이다.
OOO호, OOO호, OOOO호...
이들에겐 인사하지 않아도 돼. 우리 애들이 인사하는 데도 못 들은 척하더라고.
괘씸해서, 내가 다 적어놨어.
어느 날 남편이 그랬다. 아이들이 인사해도 받아주지 않는 어른들이 몇 층에 내리는지 다 적어놨다고. (역시 무서운 남자다. 아주 사소한 것들을 스마트폰 메모장에 기록해 두는 사람이다) 그런 남자가 우리 집 앞집에는 엄청 잘한다. 지난해 앞집 딸이 결혼한다고 하니 축의금 봉투를 건넸다. 그 이후로는 현관문에 쌈채소가 가득 담긴 봉투가 걸려있는 일이 잦았다. 서로 마주치면 안부를 묻고, 좋은 일이 있으면 축하해 주고, 나눠 먹을 게 있으면 조금씩 나눠먹는 것. 예전에는 자주 볼 수 있었던 광경이지만 요즘 어디 이런 게 흔하던가.
그러니 윗집에서 공사소음이 들려도 괜찮다, 괜찮다 주문을 외우는 수밖에. 사실 남편은 종일 회사에 있고, 아이들은 오후 늦게 집으로 돌아오니 그 소음을 감수해야 하는 건 나 하나뿐이다. 견디기 힘들면 도서관으로 달려가면 될 것이다. 어쩌면 일을 쉬고 있어 내 마음도 조금은 여유로워진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언젠가 우리 집도 이웃에게 민폐를 끼쳐 죄송하다며 수박 (혹은 다른 선물?)을 사들고 초인종을 누를 일이 있을 것이다. 하필 장마철에 공사를 시작한 윗집 아주머니네 집이 예쁘게 탈바꿈되기를 바란다. 결국 세상은 혼자 잘 났다고 살 수는 없는 곳이니까. 좋은 마음으로, 나도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윗집 가족의 안녕을 기원해 보겠다. 남이 잘 돼야 나도 잘 된다는 생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