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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May 17. 2024

오늘도 팬티 한 장 걸치고 링 위에 선다

복싱을 배운 적 없다. 복싱 경기는 TV로 봤다. 손을 보호하고 상대 얼굴에 그나마 상처를 덜 남길 목적의 얇은 글러브와 종족 번식(?)을 염두에 둔 보호장구가 그들의 몸을 지키는 전부다. 언제 어디서 날아들지 모를 주먹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훈련이 그들의 일상이다. 흘리는 땀만큼 매집도 늘고 내 주먹에 실리는 힘도 세질 테다. 하여, 모든 훈련의 목적은 불안을 극복하고 한 방에 상대를 제압하는 데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두려움은 좀처럼 벗어나기 어려울 듯싶다. 상대방과 싸운 전적이 있어도, 그렇지 않아도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알면 알아서 모르면 몰라서 두려울 테니 말이다.  


주말과 연차 휴가 이틀에 플러스 부처님 오신 날까지 5일을 쉬었다. 목요일이 오지 않길 바랐다. 바란다고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게 시간이다. 출근 전 작가로서 '의식'을 치르고 맨 몸에 팬티 한 장 걸친 심정으로 사무실에 도착했다. 사무실 안은 나만 느껴지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해야 할 일과 일의 양을 알기에 마음의 준비 같은 긴장감이 들었다. 마치 비장한 각오로 링 위에 오르는 복싱 선수처럼 말이다. 


크게 심호흡 후 자리에 앉았다. 기다렸다는 듯 전화가 걸려온다. 대표다.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네'라는 대답만으로 대화를 마쳤다.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바탕화면에 저장된 파일을 불러왔다. 멈췄던 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했다. 1라운드 공이 울렸다.


비장한 각오가 무색하리만치 싱겁게 마무리 됐다. 한 시간 만에 몸으로 쓰는 일은 끝냈다. 이제 남은 시간 동안 머리 쓸 일만 남았다. 여유를 부려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 상무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지난주 상무도 다른 현장 비슷한 업무를 지시했었다. 내가 출근하면 동시에 일을 마무리 짓고 싶어 했다. 그러니 상무도 나름 *줄 타게 내 눈치를 보고 있었던 터였다. 서열 중심 조직이다 보니 먼저 대표가 지시한 업무가 어느 정도 진행 됐는지 예를 갖춰 묻는다. 나의 성실한 답변을 듣고는 옳다구나 싶어 지시를 내린다. 내용을 들어보디 난타전이 예상된다. 호흡을 가다듬고 목을 축이고 가드를 올린다. 2라운드 공이 울렸다.


복싱 선수는 체중 조절을 위해 경기 전 물도 안 마신다고 들었다. 다행히 나는 직장인이라 밥때는 지킨다. 어김없이 같은 시간 사무실에서 나왔다. 버스 도착까지 8분, 기다릴지 말지 고민했다. 체력을 아낄 요량으로 기다렸다. 평소보다 15분 늦게 단골 식당에 도착했다. 항상 사장님과 직원이 맞았는 데 오늘은 직원 혼자 분주해 보였다. 바쁜 직원 눈치 보느라 주문도 못하고 기다렸다. 잠시 뒤 사장님이 잰걸음으로 돌아왔다. 배달을 갔었나 보다. 그 사이 주문도 많이 밀렸다. 내 앞에 샐러드가 나오기까지 20분 걸렸다. 다 먹고 나니 12시 50분이다. 이왕 늦은 거 느긋하게 걸었다. 조바심 내봐야 빨리 갈 수도 없다. 남은 시간 승부를 보려면 마음에도 안정이 필요하다. 다시 책상에 앉은 시간이 1시 20분이었다. 3라운드 공이 울렸다.


상사가 나에게 의견을 구하는 건 필요한 과정이다. 오늘처럼 넋이 반쯤 나간 날에는 알아서 지시해 줬으면 바랐다. '생각'을 할 만큼 여유가 없던 터라 의견을 구하는 게 내 귀에는 망설이는 걸로 들렸다. 짜증이라는 게 슬금슬금 기어올라왔다. 때마침 화를 돋우는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기 전에는 몰랐지만, 끊고 나니 짜증을 부르는 내용이었다. 10여 분 통화했다. 윗사람이니 꾹꾹 눌러가며 대화를 이어갔다. 만족스러운 답을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질척임 없이 대화가 마무리됐다. 상대의 깐족거리는 듯한 쨉을 의연하게 받아냈다. 다시 평정심을 찾았고 남은 일에 집중했다.  


오후 4시, 어느새 4라운드다. 맞고 때리고 주고받으며 비등한 경기를 이어왔다. 이제 승부를 볼 때였다. 이대로 끌려가다가는 제시간에 퇴근 못할 것 같았다. 일 때문에 발목 잡히면 저녁에 예정된 특강에도 영향을 줄 터였다. 상무에게 승부수를 띄었다. 그래봐야 읍소다. 대표가 지시한 일을 마무리 지으려면 당신이 지시한 일은 이쯤 해서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상무는 평소에도 열린 태도로 부하직원을 대한다. 이번에도 먼저 굽혀 기꺼이 그러라고 봐준다. 그래도 상무가 지시한 일도 검토만 하게끔 마무리 지었다. 남은 시간 공이 울리기 전까지 온 힘을 쏟아붓는다. 5시 50분, 엑셀 프로그램을 닫았다. 세 명의 심판 중 두 명이 내 손을 들어줬다. 예상했던 난타전이었고 큰 부상 없이 퇴근길에 올랐다. 그렇게 오늘도 버텨냈다. 


오후로 갈수록 마음이 쫓겼다. 일은 줄지 않았고 내 사정을 알리 없는 다른 상사의 전화에 호흡이 가빠졌고 눈동자도 갈 길을 잃었다. 한 마디로 짜증이 밀려왔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차분해지려고 애썼다. 여기서 흥분해 버리면 남은 일도 제대로 마무리짓지 못할 듯싶었다. 냉정을 찾는 게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했다. 배운 대로 생각한 대로 차분하게 응대했고 더는 귀찮은 일도 없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을 무사히 버텼다. 배운 대로 대처했기에 남은 시간 동안 냉정을 잃지 않았다. 


사람에게는 감정이 있다.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일을 그르치기 다반사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그래봤자 후회와 또 다른 질책, 해야 할 일이 남을 뿐이다. 그 순간을 무사히 잘 넘기면 반대의 결과가 남는다. 그걸 알고부터 상황에 맞는 감정을 선택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물론 상대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말이다. 내 감정이 나에게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직장에서의 처세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내 감정을 숨길 줄 알고 어떤 상황에서도 의연할 수 있는 것 말이다. 진작에 알았다면 좀 더 능력 있는 직장인이 되었을 텐데. 그래도 괜찮다. 이제라도 배웠으니 내 일을 할 때 꼭 써먹을 테다. 직장이라는 링에서 벗어난 뒤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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