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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May 26. 2024

미숫가루 타 마시며 두 딸과 소통합니다

둘째는 미숫가루 타 먹는 걸 좋아합니다. 아내가 저 먹으라고 사준 미숫가루를 먹어보더니 맛있다며 간식으로 자주 먹습니다. 마침 다 먹었길래 인터넷으로 2킬로그램짜리 2 봉지 더 주문했습니다. 토요일 아침 일찍부터 외출 준비하는 둘째. 다음 날 예정된 태권도 시범단 공연 준비를 위해 하루종일 도장에 있어야 한답니다. 아침밥으로 뭘 먹을지 물었습니다. 반찬이 마땅치 않는지 미숫가루를 마시겠답니다. 그러라고 했습니다. 미숫가루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 사과 한 개를 같이 냈습니다. 미숫가루 200밀리 한 통과 8 등분한 사과 중 한 조각만 남기고 다 먹었습니다. 옷을 입고 나가는 둘째에게 점심은 어떻게 하냐고 물었습니다. 12시쯤 집에 와서 먹겠답니다. 알았다고 했습니다.


12시쯤 둘째에게 문자가 왔습니다. 친구가 편의점에서 라면을 사준다고 점심으로 먹겠다는 내용입니다. 점심인데 라면만 먹겠나 싶어 별생각 없이 그러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저도 가방을 챙겨 집에서 나왔습니다. 동네 카페에 가는 길에 둘째 태권도장이 있습니다. 혹시나 싶어 도장 옆 편의점에 가봤습니다. 친구랑 마주 앉아 정말 컵라면만 먹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작은 컵으로 말이죠. 순간 아차 싶었습니다. 문자가 왔을 때 점심 사주러 가겠다고 말할 걸 그랬습니다. 미안한 마음에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고르라고 했습니다. 두어 바퀴 돌고 고른 게 고작 칸초와 바나나 우유였습니다.


눈치가 부족했습니다. 둘째에게 문자 받고 조금 더 생각했더라면 컵라면 대신 마라탕이라도 먹게 했을 텐데요. 며칠 전부터 토요일에 마라탕을 먹겠다고 의지를 불태웠는데 말이죠. 특별한 날, 중요한 때만 챙기는 것보다 평소에 마음 써주기를 아이들은 바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부모라면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조금 더 눈치가 있었다면 먼저 챙겼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센스가 부족한 아빠 탓에 마라탕을 먹을 기회를 날렸습니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잘 기억했다가 같은 상황이 생기면 꼭 챙겨줘야겠습니다.


큰딸도 밥은 먹기 싫었는지 우유에 시리얼 타 먹겠답니다. 안타깝게도 우유가 없었습니다. 대신 아몬드 음료에 미숫가루 타 주겠다고 했습니다. 왠지 맛이 없을 것 같다고 안 먹었던 큰딸도 롤케이크와 내주니 마지못해 먹어 보겠답니다. 한 모금 맛을 보니 먹을 만했나 봅니다. 남기지 않고 다 먹었습니다. 그러고는 가방을 챙겨 수학학원에 갔습니다.


작은 딸이 편의점에서 컵라면 먹겠다고 연락 왔을 때 큰딸은 수업 중이었습니다. 작은 딸은 점심밥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지만 큰딸에게는 다행히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1시쯤 작은딸을 만나고 큰딸 학원 근처에 카페에 자리 잡았습니다. 디엠을 보냈습니다. '끝나고 더치 앤 빈으로 와.' 두 시 조금 넘어 큰딸이 왔습니다. 미리 정해둔 식당이 있었습니다. 길 건너 우동·돈가스 전문점입니다. 점심 때면 줄 서서 먹는 식당입니다. 점심때가 지나서 기다리지 않고 자리 잡았습니다. 큰딸은 까르보나라 우동, 저는 돈가스함박을 시켰습니다. 첫맛을 보고 왜 줄 서서 먹는지 알았습니다. 둘 다 맛에 만족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습니다. 큰딸도 기분이 좋았는지 말도 많아집니다.


요즘 첫째는 영어학원 옮기는 게 가장 큰 고민입니다.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양입니다. 수업들을 때마다 선생님과 마주하는 게 불편하답니다. 불편하게 계속 다니느니 차라리 학원은 끊고 혼자서 내신을 준비해 보겠답니다. 학원 교재로 학원에 있는 시간 동안 혼자 공부해 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불편하면 공부도 잘 안 될터, 혼자라도 마음이 편하면 집중이 더 잘 될 거라고 말해줬습니다. 밥 먹는 동안 학원과 학교 과제에 대해 대화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딸과 밥을 먹으며 소통했습니다.


쓰고 보니 첫째와 둘째를 차별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 둘째가 들으면 서운해할 것 같습니다. 저라도 그럴 것 같습니다. 대신 저녁에는 둘째가 먹고 싶은 걸 우선으로 정했습니다. 돌고 돌아 결국 치킨이었습니다. 가족 모두 선택 장애가 있는 탓에 제 마음대로 정했습니다. 순살 치킨 한 마리 반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먹었습니다. 맛있게 먹는 둘째를 보며 속으로 말했습니다. '치킨이라도 맛있게 먹어줘 고맙다. 조만간 단 둘이 밥 먹자.'


밥은 저에게 소통을 위한 도구입니다. 아내가 만들어 놓은 밥과 반찬을 차려줄 때도, 반찬이 마땅치 않을 때 새로 음식을 만들어줄 때도 정성을 다합니다. 음식은 맛도 중요하지만 정성도 한몫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제가 만들어주는 음식은 무조건 맛있다고 해줍니다. 아마도 만드는 과정에 얼마나 정성을 들이는지 짐작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군말 안 하고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에 저 또한 보람을 느낍니다. 살갑고 애틋하게 애정표현은 못 하지만 음식을 통해 소통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제가 만들어준 음식이 맛있었다면 기억에 남을 겁니다. 그 기억에는 저의 정성도 함께 포함될 겁니다. 그런 기억으로 인해 미숙했던 아빠가 줬던 안 좋았던 기억이 흐려졌으면 좋겠습니다. 흐려진 기억대신 맛있게 먹는 추억이 선명하게 자리했으면 더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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